고스트라이트(2024)
극장에서 모든 조명을 끄고도 켜두는 하나의 전구. 그 불빛은 극장을 어둠에 완전히 잠기지 않게 해주며 악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어졌다. 이 불빛을 가리켜 '고스트라이트'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고스트라이트가 있을까. 인생 속 비극으로 암전되었을 때, 여전히 빛나는 빛이 있을까. 완전한 암전에 남아있지 않도록, 약하지만, 은은히 빛을 내는 어떤 것이.
영화 <고스트라이트>는 상실과 슬픔을 겪고 있는 한 가족이 그 어둠 속에서, 그런 빛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떠났으나 여전히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있었으나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허구이나 무엇보다 실재하는 빛에 대하여. 영화는 연극이라는 예술로 그 빛을 건넨다.
시카고 교외에 사는 건설 노동자 '댄'. 그의 일상은 혼돈 자체다. 소송을 준비 중인 데다 가족 관계는 순탄치 않다. 그의 딸 '데이지'는 학교에서 교사를 밀쳐 무기한 정학이 되고, 아내 '샤론'과의 관계는 소원하다.
일터에선 무례한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는 결국 난폭 운전자의 목을 조르며 소리치는 상태까지 치닫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길 건너 커뮤니티 극장의 배우 '리타'는 그를 극단에 데리고 온다.
리타와 극단이 준비하던 연극은 <로미오와 줄리엣>. 댄은 처음엔 캐풀렛 경 역할의 대본만 간신히 읽는다. 사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자세히도 모른다. 연극 같은 건 그에게 너무나 어색하다. '원래 첫 대사가 가장 뱉기 어렵다'며 단원은 그를 격려해 준다.
그는 연극 연습에 계속 가게 된다. 댄은 그곳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안식을 찾는다. 하지만 리허설 중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 장면에서 그는 공황을 겪다 폭발한다. 결말을 바꿔야 한다고,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고 고함치는 댄은 처음 입 밖으로 자신의 상실을 꺼낸다.
17살짜리 댄의 아들, '브라이언'. 브라이언은 작년에 여자 친구 '크리스틴'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 그 여자 친구는 깨어나 살아났고, 브라이언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 이후 모든 게 멈춘 댄의 시간. 이를 안 단원들은 그를 모여서 꽉 안아준다.
리타의 제안으로 댄은 로미오 역을 하게 되고, 가족 몰래 연극 연습을 하려 하지만 곧 들킨다. 데이지는 같이 연극을 하게 되고, 샤론은 학교 체육관을 공연 장소로 대관해 준다.
댄이 진행 중인 소송은 살아남은 여자 친구의 가족에 대한 소송이었다. 증언 녹취가 이어지며, 댄은 브라이언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 정황을 처음으로 진술한다. 댄은 처음에 크리스틴의 부모가 처방 약을 방치했다며 그들을 비난했지만, 결국 탓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취하한다.
샤론은 이에 화를 내지만, 우린 제대로 된 애도도 하지 못했다며 브라이언에 대해 제대로 애도하고 싶다고 데이지와 같은 뜻을 전한다. 댄뿐 아니라 그들은 여전히 상실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곧 다가온 단 한 번의 공연 날. 무대 위에서 댄은 준비한 대로 열심히 연기를 펼친다. 드디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 장면. 댄이 죽은 로미오를 표현하는 순간, 댄은 무대 뒤의 누군가를 본다. 그림자. 브라이언의 그림자. 극이 끝날 때까지 그는 그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연극이 끝나고 세 가족은 서로를 꽉 껴안는다. 뒤풀이 파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며, 그제야 오프닝 타이틀이 화면에 오른다. 마치 이 모든 일이 끝나고 그들의 어둠에서 나와 인생이 흘러갈 수 있게 됐다는 듯. 허구의 일은 끝났지만, 그 허구와 기억이 고스트라이트처럼 켜져 그들을 지켜주듯이 말이다.
상실과 치유는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대의 중심에서 나의 풍경으로 변한다.
풍경
아무것도 아닌 것이
풍경이 되는 일은 아름답다
회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도처럼
가방을 열면
너의 손이 담겨 있지
의미도 무의미도 없이
피어나는 꽃으로
이상한 유언을 쓰다가
부끄러워 살고 싶어질 때
경계도 없이
투명한 공중으로 던져올리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나는 왜 여기에 없고
너는 왜 여기에 있는가
고통스러운 두 사람을 본다
내가 만지는 네가
웃고 있는 풍경
'회복할 수 없는 삶'. 나는 여기에 있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상대가 없는 삶. 그런 삶이 살아가는 모습을 박은정 시인의 시 <풍경>은 그리고 있다. 우리는 상실을 마주하면 의미를 찾는다. 이유와 원인을 찾아서 탓한다. 하지만 지나면 알게 된다. '의미도 무의미도 없이 / 피어나는 꽃으로'라는 구절처럼, 더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그 상실과 같이 살아간다.
상실과 살아 간다는 것은 것은 망각이 아닌, 풍경이 되는 것다. <고스트라이트> 속 댄의 가족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상실을 부러 잊는 것은 치유가 아니다. 과거의 행복과 더불어 상실까지도 풍경으로 두는 것. 상실도 행복처럼 품고, 과거의 은은한 빛을 느끼며 삶을 계속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풍경이 되는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인생이 거기서 멈춰버린 듯한 상실 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화 <고스트라이트>는 극복을 종용하거나 허구와 기억에 파묻히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허구 또한 현실의 일부라는 작은 불빛을 켜놓는다. 기억이든 연극이든 현재 실재하지 않는 그곳에서도 진실된 감정은 빛나고 있으니 외면하지 말라고.
연작적 인생 속 과거와 허구에서, 우리에게 보내는 '고스트라이트'. 그것을 풍경 삼아 살 수 있다고 영화는 우리 속 어딘가를 가리킨다. 자신의 고스트라이트가 어디든 있으니 그 풍경을 한 번 보라고. 첫 대사가 가장 뱉기 어렵듯, 단지 처음 찾아보는 것이 힘들 뿐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