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일

하나 그리고 둘(2000)

by 명태

"삶이 영화 같다면 영화가 뭐하러 존재해!"

에드워드 양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속의 한 청년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영화는 삶을 모방한 것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영화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먼저. 우리는 왜 우리 삶의 모방을 만들까. 우리는 그 모방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삶이 그렇듯 영화 <하나 그리고 둘> 또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양양'이 사람들의 뒤통수를 찍으러 다녔듯, 우리가 시선을 돌려도 결코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타이베이의 중산층 가정. NJ 처남 결혼식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후 NJ의 장모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지고, 의사는 가족들에게 매일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주라고 권한다.



아내는 혼수상태인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을 걸다가 자신의 일상에 공허를 느끼고 사찰로 들어가 버린다. 첫째인 '팅팅'은 옆집 소녀 '릴리'와 친구가 되고 그녀의 남자 친구 '패티'와 가까워진다. 아직 여덟 살의 '양양'은 아빠인 NJ에게서 카메라를 받아 사람들의 뒤통수를 찍기 시작한다.



가장인 NJ는 위기를 맞는다. 회사는 경영난에 처해 있고, 일본인 게임 개발자 '오타'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NJ는 이 와중에 자신의 첫사랑인 '셰리'와 30년 만에 재회하게 되고 도쿄 출장을 함께하게 된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고 NJ와 셰리는 서로에게 묻지만, 이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결국 셰리는 말없이 떠나고 NJ는 깨닫는다. "다시 산다 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요. 똑같을 거예요." 인생의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 후, 그는 지금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한다.



팅팅도 옆집 소녀 릴리의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마음을 접는다. 집에 돌아와 혼수상태의 할머니 옆에서 푸념하며. 결국 할머니는 돌아가신다.


타이베이의 일상은 여전하다. NJ의 회사는 어찌저찌 굴러가고, 아내는 사찰에서 돌아오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릴리는 남성 편력은 여전하고, 패티는 경찰에 잡히고, 처남은 돈에 쩔쩔 매며, 양양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다.



영화는 양양이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편지를 읽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 속엔 극적이거나 격정적이고 파국적인 순간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모든 인물의 삶이 조금씩 바뀌었다고.


내가 계속 나일 때 - 신용목

물이 끓는다
물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아닌 것이 되려 하고 있다

아닌 것이 되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보리차 티백을 넣는다,
베란다 화분에서 사철나무 잎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처럼 눈이 내리고

오래전 봄날, 곰을 잡고 곰의 두개골에 화장을 해 숲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곰이 하얗게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그때까지가 가을이었으니까

창밖 단풍나무 잎은 여태 지지도 않고 눈을 받고 있다 하나의 발자국이 다른 발자국의 바닥을 잠시 견뎌 주고 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잠시 나를 받아주고 있다,
생각하면

몸은 신전처럼 더워지고 예배처럼 슬픔이 모여든다

그때까지가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그냥 살았을 뿐이다
나는 계속 나였다

내가 끓었을 때
그가 왔다

그리고 식어가는 시간이었다


<내가 계속 나일 때>의 '물'은 '물/아닌 것이 되려'고 끓는다. 물을 끓이는 동안 시 속 화자는 생각한다. 그 생각 속 상상과 함께 '몸은 신전처럼 더워지고', 물과 함께 '내'가 끓는다. 물이 끓기 전에도 끓은 후에도 모습은 달라고 본질은 같은 물H₂O이듯, 화자는 결국 생각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주한 '식어가는 시간'이 온다.


이 시 속의 상상하는 화자는 <하나 그리고 둘>의 인물들처럼 '만약에'라는 변화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계속 우리 자신이다. 물이 끓어도 여전히 물H₂O이듯.


'하나의 발자국이 다른 발자국의 바닥을 잠시 견뎌 주고 있다'처럼 그런 끓고 식는 순간, '하나의 발자국이 다른 발자국의 바닥을 잠시 견뎌 주고' 있는 모습은 양양의 할머니를 묘사하는 듯하다. 극 중 내내 혼수상태로 나오지만, 모든 인물의 고해를 듣고 또 정신적 위안의 장소가 되듯이. 인물들은 그 고해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한다. 양양이 찍은 뒷모습 사진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도, '내가 끓었을 때 그가 왔다'처럼, 내가 끓고 식는 순간, 그저 물의 온도 변화에 지나지 않는 그 삶의 순간이 지나가면 오는 '그'가 있다. 아마 이것은 조금 더 살아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늘 사는 일이 제자리 같다고 느낄 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가끔은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은 다른 삶을 살지 궁금해하지만, 과연 그 삶이 크게 다를까 싶기도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닐까.


"삼촌은 자기 뒷통수를 못 보잖아요. 그래서 내가 찍어줬어요."


극 중 양양이 뒤통수를 찍어서 보여줬듯, <하나 그리고 둘>은 관객에게 각자가 놓치는 삶의 흐름을 찍어 보여주는 듯하다. 대다수의 일상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매일 쳇바퀴를 도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둘>이 그랬듯, 우리는 멈춰있지 않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도, 매일 우리는 시간과 함께 어디론가 간다. 설령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번복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가끔 다른 삶이 궁금해 책과 영화를 탐닉하며. 이런 삶도 유의미하게 살아가려 부단히 쳇바퀴 아닌 일상의 굴레를 앞으로 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