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트(2025)
수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었다. 경전도 세상도 계속 문명의 끝, 종말을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 세상은 잔혹한 시기로 가고 있지만 아직 망하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인가. 그리고 매일 들려오는 암울한 세상과 죽은 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왜' 살아 있는가. 이것에 어떤 논리적 이유가 있는가.
'시라트(Sirāt)'는 이슬람교의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이다. '건너려는 자, 조심하라. 그 길은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롭다'는 말이 영화의 제일 처음 등장한다.
영화 속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다. 그저 죽음과 상실, 흐려진 목적에도 살아가는 현실만이 있다. 영화의 배경인 사막보다도 척박한 삶. 왜 살아있는지 왜 죽었는지 이유도 모르는 인물들. 영화<시라트>는 그저 우리가 사는 현실을 극대화해 삶의 무작위성을 보여준다.
영화 속 상황은 이미 3차 세계 대전 중. 그런 시국 속, 도시와 떨어진 북아프리카 사막 어딘가 설치되는 스피커들. 네모난 스피커들로 만들어진 십자형 틈새로 빛이 비친다. 그것도 잠시. 몸이 울리는 테크노 음악이 시작된다.
하나 둘, 등장하는 레이브 파티를 즐기러 온 사람들. 광대한 사막 속, 그들은 무아지경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딸을 찾는 남자 '루이스'와 그의 아들 '에스테반'이 나타난다. 다섯 달 전 연락이 끊긴 딸을 찾기 위해 유럽에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 사막 레이브 파티를 쫓아다니는 중이다.
'루이스'는 레이브 파티에 모인 사람들에게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 있느냐 묻는다. 레이버들은 개개인적으로는 신경을 쓰는 듯 하나, 전체적으로는 모두들 춤추느라 관심이 없다. 흙먼지와 땀, 우퍼로 몸을 울리는 일렉트로니카 음악과 술. 그리고 이들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 이런 시간도 잠시. 군대의 즉각 대피 명령으로 파티가 해산된다.
이때 군의 차량 인도를 벗어나 도망가는 한 무리의 레이버를 루이스는 쫓아간다. 다른 레이브 파티에서 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루이스 부자는 위험한 사막 횡단을 시작한다.
유럽 등지에서 온 레이버 무리(스테프, 제이드, 토닌, 비기, 조쉬)는 루이스 부자와의 연대가 생겨난다. 난처한 상황에 서로를 도와주며 사막을 횡단하는 이들이 점차 가까워지던 차. 이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들의 첫 번째 충격이자, 극 중의 첫 악몽이 시작된다.
절벽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는 길. 에스테반이 차와 그대로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만다. 어떻게 막아 볼 새도 없이 그대로 아득한 충격음을 내며 떨어지는 차. 오열하며 달려가는 루이스를 일행은 붙든다. 두어 번 나는 차의 추락 소리가 바위에 부딪혀 울리고 아무 소리가 없다. 그저 울부짖는 루이스의 소리뿐.
시신을 수습하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는 상황. 루이스의 충격을 레이버 무리는 돌봐준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 도착해 그들이 가진 우퍼를 설치하고 음악을 튼다. 마침내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게 된 루이스와 신나는 일렉트로닉 음악이 울리던 때, 갑자기 자드의 몸이 폭발한다. 그를 따라간 토닌도 바로 폭발하고 만다. 예상치 못한 충격의 장면. 인물들 간의 생성된 연대와 그것을 보는 관객 사이에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뢰밭이었던 사막 한가운데. 어떻게 여기까지 차를 몰고 들어왔는지도 모르겠고,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만 지뢰밭에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을 보는 관객 또한 다음은 누가 죽을지 모르는 지뢰밭에 있게 된다.
남은 이들은 차와 자신들의 생필품을 이용해 지뢰를 먼저 터뜨려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루이스는 지뢰가 없는 바위산까지 그냥 걸어간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걸어간 비기는 바로 터지고 만다. 루이스가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갔을 뿐인데도. 그리고 남은 이들은 화물선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로 가득한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이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더 이상 루이스가 딸을 찾는지도 알 수 없다. 삶이라는 무작위성, 그리고 남은 이유 모를 죽음과 이유 모를 삶만이 엔딩 크레딧의 일렉트로니카와 함께 관객에게 던져진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체험적인 면이 있다고 느꼈다. 영화 속 플롯보다 관객의 영혼에 상흔을 내고 싶다는 감독의 말을 빌자면 확실히 이 영화는 사전 정보 없이 타인에 섞여 극장에서 관람하는 게 맞다고 느낀다.
박규현 시인의 시 <렘뿌양> 또한 이렇게 타인들과 천국 문 앞에서 기다리며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렘뿌양
천국의 문이라고 했다
그 문턱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한 시간을 기다렸다
천국으로 가는 문 같은 것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점프도 하고 연인과 다정하게 팔을 두르기도 했다 하하하하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
네 가방 안에 물의 형상이 있다
일행이 내 가방 속 페트병을 보고
말했다 저기에 천국의 형상이 있다
손차양을 만든 뒤
나를 다 가렸다고 착각하는 동안에
누군가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다 사람으로부터 얻어맞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이 잘리기도 한다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천국의 문은 유의미한가 아니면
희미한가
내 차례가 다가오는 중이다
천국에 가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부터 해야지
해본 적이 없으니까
죽지 않고서
천국에 갈 수 있는 포즈에 대해 고민했고
우리의 뒤로 줄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살아 있는 행렬이었다
'렘뿌양'은 발리의 사원으로 천국의 문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시의 천국 문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과 <시라트> 속 레이브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은 같은 위치에 있다. 여행과 파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현실이지만 현실에서 살짝 뜬 공간.
그러는 동안, '누군가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다 사람으로부터 얻어맞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이 잘리기도 한다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갑작스럽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과 죽음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도사리고 있다.
'죽지 않고서/천국에 갈 수 있는 포즈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시라트>의 인물들을 상기시킨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갔지만 지뢰에서 살아남은 루이스, 그러나 동일하게 따라가다 폭사한 비기. 한낱 인간의 고민은 생존의 무작위성 앞에서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뒤로 줄이 이어졌다/끊임없이/살아 있는 행렬이었다'는 목적지를 모르는 열차에 그저 탑승해있는 생존자들의 모습 같다. 어쩌면 이 영화를 다 본 관객들이 실려가는, 알 수 없는 삶의 흐름같기도 하다.
이 '시라트'와 '지뢰밭'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다. 멈추면 가능성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막. 발 디딜 곳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사는지 죽는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디뎌야 하는 펼쳐진 땅. 머리카락보다 가는 확률과 칼날보다 날카로운 아픔에도 건너가야 하는 다리. 이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런 무작위성과 자신의 생존 앞에서 <시라트> 속 생존자들이 애도를 깊이 할 수 없어 잃었듯,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어떤 상실은 치유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급박한 것은 시라트를 건너는 자신들이다.
마지막에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상관이 없다. 관객은 루이스가 여전히 딸을 찾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목적은 사라졌고, 의미는 흐려졌지만, 삶은 계속된다.
시라트는 천국과 지옥을 가로지르는 다리이지만, 살아 있는 삶 속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다. 그저 순간만이 존재한다. 생존 그 자체가 전부이자 끔찍한 소식에도 멈출 수 없는 세계. 건너야만 하는 시라트는 천국과 지옥 사이가 아닌 이 지상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시라트>는 묻는다. 수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이 세상, 암울한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어떻게 살아있는가.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엔딩 크레딧의 일렉트로니카와 함께 관객을 현실 속으로 내보낸다. 살아있는 행렬의 일부로. 레이브 파티에 다시 돌려놓듯이.
극장을 나와 우리는 여전히 그대로 살 것이다. 무아지경의 레이브 파티 속 사람들처럼, 닥친 삶에 허덕이면서. 하지만 언젠가 다시 우리가 가는 길이 시라트임을 느끼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천국의 문은 유의미한가 아니면 희미한가' 답은 여전히 알 수 없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