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법

햄넷(2025)

by 명태

잃은 사랑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을까. 상실의 아픔과 슬픔이 매분 매초 나를 떠나지 않는데, 무엇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클로이 자오 감독의 <햄넷>은 이것이 예술 안에서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단순히 셰익스피어의 햄릿 창작기에 대한 픽션이 아니다. 예술로 사랑을 보존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영화이다.


애도란 사랑이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랑은 애도를 멈출 수 없다. 영화 <햄넷>은 그 애도를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케 한다. 단지 애도와 기억 뿐 아니라, 다른 형태로 사랑하는 이를 보존할 수 있다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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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햄넷(Hamnet)'과 '햄릿(Hamlet)'은 같은 이름으로 혼용되었다.' 이해를 위해 등장한 문장일 수도 있으나, 어쩐지 아들의 이름으로 극을 썼다고 암시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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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한가운데, 붉은 옷의 여자가 나무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다. '숲속 마녀의 딸'로 불리는 그녀의 이름은 '아녜스'. 그녀는 매를 키우며 사람들 사이보다 자연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의 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던 한 남자 '윌리엄'.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 바깥으로 뛰어나간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녀를 쫓아다니던 그에게 아녜스는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윌리엄은 그녀에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들려준다. 이 신화는 극 중 내내 모티브가 되어, 이후 아녜스가 윌리엄에게 뒤돌아보라고 되뇌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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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둘은 아이가 생겨 결혼하게 된다. 첫째 '수재나'를 낳고 엄마가 된 아녜스는 어릴 적 엄마와의 기억을 회상한다. 자신의 남동생 '바솔로뮤'와 함께 약초를 찧으며 나누던 대화들을.

'상처는 나쁜 게 아니야.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지 말렴. 마음을 열어.'

한편 아빠가 된 윌리엄은 폭력적인 부친에게 저항하지만, 밤새 글을 쓰면서 답답함에 폭발한다. 길을 잃은 것 같다고 좌절하는 윌리엄을 아녜스는 런던으로 보낸다.



런던과 집을 오가는 윌리엄. 그리고 두 번째 임신을 한 아녜스. 폭우가 쏟아져 길이 잠기던 날, 아녜스는 쌍둥이를 낳는다. 아이 하나는 태어나 바로 울지 못하지만 이내 품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아녜스는 두 아이의 울음을 들으며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겠다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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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연극계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윌리엄과 아이들을 키우는 아녜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비춰진다.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빠가 집에 머물지 못하는 게 아이들은 늘 아쉽다. 특히 아들인 '햄넷'은 아빠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한다. 시무룩한 햄넷에게 윌리엄은 말한다. "네가 네 누이들과 엄마를 지켜야 한단다, 그러니 용감해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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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에겐 어떤 직감이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손바닥을 잡으면 그 사람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는. 처음 윌리엄을 만났을 때, 그녀는 그의 손에서 여러 풍경을 보았다. 아마도 그가 쓸 희곡들의 풍경을 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햄넷의 손도 잡아준다. 엄마에게 무엇이 보이냐 묻는 햄넷에게 아녜스는 답한다. 런던 극장에서 아빠의 극에 등장하고 있다고. 햄넷은 나무 칼을 들고 싸우는 시늉을 하며 자신이 이기는 배역을 맡는다고 재롱을 부린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시간도 잠시. 런던과 잉글랜드에는 전염병이 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주디스는 병에 걸리고 아녜스는 주디스를 살리기 위해 밤낮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던 밤, 햄넷은 주디스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죽음을 속이자고 그 애의 옆에 눕는다. 자신의 아버지가 당부했던 말을 되뇌면서. "용감하게 굴게요, 아버지. 내 삶을 줄게, 주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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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불을 뒤집어쓴 쌍둥이의 운명은 바뀐다. 금방 나은 주디스와 달리 햄넷은 병상에서 죽고 만다. 뒤늦게 도착한 윌리엄은 딸 주디스가 살아있음에 기뻐하지만, 뒤에 놓인 아들의 시체 앞에 무릎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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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아녜스에겐 웃음이 사라진다. 런던으로 떠나는 윌리엄도 납득할 수가 없게 된다. 매일 매분 매초. 그녀는 아들의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둘의 사이는 싸늘해진다. 어떻게 아들이 죽을 때 옆에 없었느냐며 부르짖는 아녜스에게 윌리엄은 사과하지만, 상실이 너무 깊어 돌이킬 수가 없다. 윌리엄 또한 아녜스에게 토로한다. 언제 어디서 무얼하든 내 아들이 어디에 있을까, 그저 사라질 리 없는데 어디에 있을지 항상 생각한다고.



햄넷이 죽은 지 1년 후, 스트랫퍼드로 이사하지만 여전히 윌리엄은 런던에서 홀로 일한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아들 이름으로 윌리엄이 비극 공연을 상연한다는 전단을 받는다. 어쩌지 못하는 아녜스에게 바솔로뮤는 말한다. "가서 어떤 건지 봐야지. 마음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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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윌리엄의 연극을 보러 간 아녜스. 극의 시작이 어떻게 내 아들과 관련이 있느냐며 감히 내 아들을 들먹이냐며 분노한다. 하지만 이내 '햄릿' 역 배우의 등장으로 그녀는 잠잠해진다. 햄넷과 같은 모습. 금발로 염색한 머리와 햄넷이 입던 색상의 옷. 그리고 먼저 '햄릿 아버지의 유령'으로 윌리엄이 등장한다. 아녜스는 알아차린다. 윌리엄이 자신과 아들의 위치를 바꿨다고. 아들에게 하지 못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다고.



햄릿이 자기 삶의 이야기를 대신 들려달라는 대사와 함께 죽는 장면. 그는 객석을 향해 손을 뻗고 아녜스는 그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일제히 객석 모두가 죽어가는 햄릿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경이로운 광경. 그녀에겐 단지 연극이 아닌 아들의 현신 같은 상황. 모든 사람이 같이 애도하는 모습을 둘러보며 그녀는 햄넷의 환영을 본다. 무대에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자신의 아들을. 그녀는 그제야 웃음을 터뜨린다. 무대 뒤의 윌리엄과 마주 보며. 연극 속에 자신의 아들을 살려두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애도를 받게 한 윌리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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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넷〉은 한 예술가의 전기가 아닌, 상실과 사랑, 애도와 치유를 예술로 옮긴 영화이다. 상실을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이 '이야기 속에 살아있게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박정대

태어난다는 것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그러나 이 세 가지 거짓말을 다 덮을 수 있는 마지막 아름다운 거짓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박정대 시인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삶을 사랑으로 덮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 시 속의 '태어난다는 것/산다는 것/죽는다는 것'은 햄릿 속의 유명한 문장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이것을 세 가지의 거짓말로 칭한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가장 큰 거짓말, 그 아름다운 거짓말로 이 모든 삶의 과정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 즉 '허구'가 가진 힘이란 이런 것이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사랑과 존재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햄넷>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와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뒤돌아보면 안 되는 금기가 아닌, 함께 돌아볼 것을 권한다. 우리가 마주한 죽음과 상실, 상처를 없던 것으로 외면할 것이 아니라 돌아보라고. 그리하여 그 모든 상실마저 덮는 사랑을 지속하라고 말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강한 정신력을 가졌어도 사랑하는 이의 상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럴 때 우리는 뒤돌아보는 것을 금기시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로 극복을 촉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극복해야 할까. 상실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사랑할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애도와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런 방법에 예술이 있다고, 영화 <햄넷>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극초반에 아녜스가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해보라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준다. 예술의 힘, 허구가 가진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 힘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