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이후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

해피엔드(2024)

by 명태

'해피엔드'. 영화의 제목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제목을 들으면 어쩐지 행복이 영영 끝나는 기분이 든다. 지금의 행복이 이대로 끝난다면 어떨까. 학창 시절이 졸업과 함께 끝나듯 행복도 그렇게 끝날 것만 같다. 학생 타이틀이 멀어질, 교복 입은 아이들. 여기까지의 모습은 이 영화 또한 여타 다른 청춘물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해피엔드>는 마냥 청춘을 다루지 않는다. 사실 정치적이다. 생각해 보면 청춘과 정치가 굉장히 먼 것 같지도 않다. 청춘도 세상 가운데를 지나가고, 청춘이 지나가도 정치와 사회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 시절이 지나가면 오는 것은 또 다른 한 시절이듯.


그렇다면 지금의 행복이 끝나고 올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미래는 영원히 미지겠지만,

주인공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가까운 미래의 일본. 대지진의 공포와 AI 감시 체제, 얼굴 스캔으로 신분을 검사하고 제노포비아와 정치 프로파간다가 만연한 사회. 밤에도 깜깜하지 않은 점멸등과 전광판의 도시. 그저 테크노 뮤직만이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움직이는 비트라고 느끼며 모이는 5명의 음악 동아리 학생들이 있다.


집이 자주 비는 '유타', 재일 한인 4세 '코우', 아버지의 고향인 미국으로 가려는 '톰', 유머 감각이 있는 '아타', 대만인의 뿌리를 가졌지만 중국어를 못해서 창피해하는 '밍'. 음악 동아리의 아이들은 철거 예정 빌딩에서 불법으로 열리는 테크노 클럽에서, 밤늦은 동아리 방에서 춤추기를 좋아한다. 어느 학생들이 다 그렇듯, 일탈을 갈망하며 진로와 미래를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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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유타와 코우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교장의 웃기는 스포츠카를 수직으로 땅에 세워버리는 일을 저지른다. 그 일로 교장은 학교에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하고 벌점을 매기며 학생들을 탄압한다. 그날 이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게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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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탄압은 타자화로부터 시작된다. 타자화에는 내집단과 외집단을 갈라, 내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며 내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메커니즘이 있다. 이때 내집단에 포함되는 이들은 이런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차별에 대해 별생각이 없거나 보호정책이라 여긴다. 하지만 외집단에 속해 타자화되어 소수자로 분류된 이들에게 차별과 배척은 무척 지난한 일이다.


학교 안의 AI 감시 시스템은 학교 밖 사회에서 크고 소소하게 벌어지는 모든 탄압을 상징한다. 영화 속에서 사회적 차별에 불이익을 받지 않는 민족적 일본인 유타는 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음악동아리 친구들에게는, 특히 코우에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학교 안 AI 감시 체제, 학교 밖 재난에 대한 공포를 빌미한 긴급사태조항의 억압 체제. 저항정신이 있는 '후미'라는 동급생과 코우는 학교와 사회라는 이중의 억압 구조 속에서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연대하고 저항한다.



한때 영원히 친할 것이라 믿었던 유타와 코우의 우정 또한 이런 구조 안에서 멀어진다. 코우가 사회에서 차별과 탄압에 깨어 저항하는 모습은 유타에게 한없이 낯설다. 유치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이제 더는 자신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작 느낀 코우가 먼저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둘의 관계는 달라진다. 유타와 코우는 서로에게 실망도 하고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하며 부딪힌다.



애초에 둘이 친한 적 없다면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족적 일본인과 재일교포 4세인 둘이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흡수한 채 만났다면, 서로에 대한 기대치도 우정도 추억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분노도 사랑이 있어야 생길 수 있다는 감독의 말처럼, 막역한 둘의 사이는 분노와 애정 사이를 오가며 성장통을 겪는다. 학교라는 곳을 벗어나기까지.


육교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고선경 시인의 <방과후 우리의 발생>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한다.


방과후 우리의 발생

알록달록한 전구들을 몽땅 깨뜨리고서
우리는 뾰족해진 발걸음으로 걸었어
빈 교실을 찾아서

둥글게 모여 앉아 식물도감 읽었지
파릇파릇해지려고

이곳은 책으로 지은 정원이야
물 끓는 소리만 들려줘도 퉁퉁 불어

어둠 속에서도 울음을 정확하게 읽는 너는
알전구의 짭짤함을 아니
와작와작 씹히는 음절들 말이야

한쪽 뺨이 투명한 너는 색감을 좀 아니
상처가 어떤 농도로 변해가는지

아니 똑바로 봐봐
여기 우리밖에 없잖아
싫으면 엎드려뻗쳐

초록 속에서 우리는 보글보글 끓었다
한 방울만 튀어도 책장 사이로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우리는 서로의 성장을 기대하며 서로의 귀에 씨앗을 심어 주었지 어른이 되면 갚아, 다정하게 속삭였지 그렇게 무럭무럭 우정을 길러냈잖아 푸른 식물을 태울 때 공기는 얼마나 오염될까

우리의 종아리는 수시로 흘러내렸고
땀방울이 죽죽 빗금을 그었지

왜 그렇게 맹렬해야 했을까

졸업이 가까워지자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은 저절로 허물어졌다

우리는 식물도감에 적히지 않은 내용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불 없이도 타들어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유리창으로 달려들었다가 시체가 된 것들을 발견했을 뿐인데 반성문을 적어야 했던 일과 우리가 자발적으로 우리가 된 일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포옹도 악수도 없이 헤어졌는데
그것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유타와 코우는 작별이나 포옹도 악수도 없이 나중에 또 보자는 말로 인사했는데도, 이게 끝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과연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으로 큰 것일까.


영화는 단순히 청춘의 시절인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탄압이 정의로 둔갑하는 일이 만연한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과 관계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이동하는지 보여준다. 학교와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타자화된 소수자들로, 그들과 더불어 청춘들로.


<해피엔드>의 10대들의 모습은 아이들뿐 아니라 불안이 만연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세대가 어떻게 희망을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담담한 희망을 가진 영화 같다. 사회 전체와 더불어 현시대를 사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다.

진정한 해피엔딩이 무엇인가. 영화는 러닝타임 내에 말했고 영화는 끝났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저항하며 연대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제 우리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며 나아가야 할 때다. 행복 다음에 오는 것이 더 나은 행복의 모습을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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