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합성되지 않은 창작에 중독된 자들

네이키드 런치(1991)

by 명태


1991년도 영화인데 국내 정식 개봉은 2025년인 영화가 있다. 책도 영화도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영화 <네이키드 런치>이다. 개인적으로 추측건대 이 영화가 90년대에 개봉했다면 상황이 크게 달랐을까 싶기도 하다.


"이것을 토해내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라 묻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내 안의 이것들을 어떻게든 내놓지 않는다면, 내 안에서 아우성치게 둔다면 창작자는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화와 영화 주인공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자기 고백처럼 관객에게 묻는다. 이것들을 뱉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고.



해충 방역 일을 하는 주인공 '윌리엄 리'가 있다. 그의 아내 '조앤'이 살충제에 중독되어 환각의 세계에 빠지고, 그 또한 마약 문제가 있던 터라 자연스레 아내를 따라 해충 약에 중독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소위 난해하다고 불리는 영역으로 진입한다. 영화는 환각과 실제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 둘은 중첩되어 있으며 혹은 같은 이야기로까지 느껴진다. 거대한 벌레 모습을 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타자기, 머그웜프라 불리는 괴생명체와의 대화 등등. 이것들은 주인공들이 보는 환각이 과연 우리가 실재하는 세상과 그렇게 크게 다르냐고 우화적으로 묻는 기분까지 든다.



해충 약에 취한 리는 아내와 '윌리엄 텔 놀이'를 한다. 그녀의 머리 위에 컵을 올리고 실제 권총으로 쏘아 맞히는 위험한 게임이다. 그는 이 놀이를 하다 실수로 아내를 죽인다. 이는 원작자 윌리엄 버로스의 실제 이야기로,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자전적 소설의 핵심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도 넘을 수 없는 것은 생경한 죽음의 물적 무게다. 시체의 무게, 흉기의 무게 같은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어 글을 쓰게 된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창작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아내를 살해하고 도시에 남을 수 없던 그는 '인터존'이라고 하는 기업의 본거지로 도망친다. 이를 기점으로 더는 현실과 환각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탕헤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인터존에서는 환각이 곧 현실이다. 거대한 벌레 모습으로 말하고 살 움직이는 타자기, 거대 지네 고기로 만들어진 환각제, 죽은 아내와 이름이 같은 작가와 그 부부…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타자기들은 리에게 계속 당신은 작가냐고, 글을 쓰라고, 환각을 보라고 종용한다.



사람들과 타자기의 글을 쓰라는 독촉, 아내에 대한 죄책감, 자기기만, 예술과 중독의 관계 속에서 리는 마약과 창작의 순환을 빙빙 돈다. 리가 구분하지 못하는 현실과 섞인 환상을 보는 동안 관객도 환각의 서사를 그대로 체험한다.


그런데 리가 겪는 이 모든 환각의 기괴함이 사실 크게 먼 것은 아니다. 창작을 해본 사람이라면 겪는 현실적 감정들이다. 내면의 상상과 혼돈, 현실성과 현실 도피성, 창작하고 싶은데 하고 싶지 않은 양가적 감정. 말하고 움직이는 유기체-타자기는 단순히 환각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라, 창작물이 되려 창작자를 종속(중독) 시키기도 하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인가, 아니면 글이 우리를 쓰는 것인가. 타자기를 통해 써내려가는 것들이 과연 우리의 의지인가, 아니면 우리 안의 어떤 충동이 우리를 통해 발화하는 것인가. 머그웜프로 구현된 타자기는 작가에게 그 자체로 물음이다.



리가 아내를 죽이고, 그 고통을 바탕으로 글을 쓰며, 작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윌리엄 버로스 자신의 이야기이자 창작자들의 고뇌이기도 하다. 자신의 가장 어두운 내면이 동기가 되고 재료가 되어 발화하는 창작의 과정. 영화 속 리에게 그 대가로 남는 것은 환상이 주는 구원이 아니라 더 깊은 고통과 상실임을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리는 아넥시아라는 국가로 인터존에서 만난 조앤과 떠난다. 아넥시아Annexia라는 국가 이름은 묘하게 기억상실증amnesia같이 들려, 이후 되풀이되는 상황 때문에 묘하게 느껴진다.



아넥시아 입국검문소에서 리는 또다시 '윌리엄 텔 게임'을 반복하는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운명론스럽다. 리는 그럴 수밖에 숙명을 타고난 듯 보인다. 인터존에서의 리가 마약을 끊을 수 없었듯, 현실에서도 창작을 끊을 수 없다. 창작은 끝나지 않는다. 고통도, 중독도, 자기파괴도. 죽은 조앤의 시체를 끌어안자 비로소 입국허가를 인정받는 그의 모습은 예술의 영광과 파멸은 동전의 양면 같아 보이기도 한다.


결국엔 창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어떤 운명적인 귀결. 유선혜 시인의 <반납 예정일>이라는 시 또한 이런 고민을 담고 있다.


반납 예정일

연구실에 꽂힌 철학책의 목록을 눈으로 훑는다. 향연, 국가, 소피스트, 고르기아스, 테아이테토스······

노교수님이 타 주신 밋밋한 녹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교수님은 내 졸업논문의 주장이 참신하지만 타당하지는 않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셨고

나는 단지 우울하다고만 했다.

교수님은 헛기침을 하며 한마디 하셨다.
자네, 시를 그만 읽어보는 건 어떤가?

교수님의 얼마 남지 않은 흰머리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딴생각만 했다.
말대답만 했다.

그런데요, 교수님,
어느 날부터 숱하고 괴상한 형체들이 눈에 보이는데요, 그것들은 전봇대를 감는 전선줄처럼 다리를 기어 올라 오고요, 강아지 모양으로 꼬인 풍선처럼 부풀어서 제 앞길을 가로막았어요. 말랑거리지 않고 딱딱해서, 꼭 플라스틱 같아서, 왜 풍선 같은 것이 그토록 단단한지 몰랐는데요,
그것은 미래였어요.
꿈들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떠올라서 저를 훼방 놓았어요.

이걸 쓰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

있잖아요, 교수님,
언젠가부터 눈을 감으면 눈꺼풀이 무수히 검어지는데요, 에이포 용지에 억지로 지른 불펜 똥처럼요, 여기서 흡연하면 개새끼, 라고 갈겨써놓은 경고문처럼요, 지저분한 글씨체로 흩어지는데요,
교수님의 미래도 그런 무질서한 궤적이었나요? 날카롭고 채도가 낮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엉망진창이었나요?

시집을 읽다 잠들면 시 속의 목소리들이 꿈에서 들렸다. 소리들은 윙윙대며 내가 꾸는 꿈을 입 밖으로 꺼내면 죄다 끝장나버릴 거라며 겁을 줬다.

······너 그러다 큰일 나······
······그렇게 살면 큰일 나······

그러나 나는 기어이 써버리는 사람
논리도 없이
비약만 있는 미래를 꿈꾸고
망해버린 꿈들을 죄다 옮겨 적는 사람

이걸 토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

교수님은 인자하게 웃으시며 졸업에는 문제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연구실 문을 닫고 나오자 졸업 전까지 가방 속의 시집들을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 책『네이키드 런치』를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영화와는 다르며 책 또한 컷업 방식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창작되어 난해하다고 한다. 영화 또한 난해하지만, 이 작품은 창작의 본질과 그 대가에 대해 물음의 물음을 더해준다. 이 영화는 관객을 편안하게 두지 않으니까.


<네이키드 런치>가 이제 와서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창작자 자신들이 더욱 치열하게 자신을 소진하며 무언가를 토해내야 하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이것들을 뱉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네이키드 런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더욱 예리하게 벼려내는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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