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만세(2022)
나는 가끔 궁금하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천국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지옥 중 어디가 더 나을까. 사후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저런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아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고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지옥 만세>는 나랑 결이 맞았다.
타인들의 천국 속 나 홀로의 지옥보다, 함께 겪는 지옥이 더 나은 듯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지옥 만세>로 불려도 좋은 건 타인의 천국이 아닌 서로가 버틸만한 지옥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말이 마음에 든다.
"웰컴 백 투 헬이다!"
"오키오키!"
친구도 한 명 없이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쏭남', 송나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전학생 '황구라', 황선우와 같이 폐건물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선택이 그렇듯 죽으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억울하다. 고작 10대인데, 가해자인 누구는 유학을 가고 누구는 이렇게 구린 데에서 죽어야 하다니. 그들은 죽기 전 자신들을 괴롭혔던 '채린'을 찾아가 복수하겠다 다짐하며 무작정 가출해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을 헤매다 둘은 '효천 선교회'라는 허름한 건물에서 채린을 찾는다. 서울에 가서 잘나가는 줄 알았는데, 웬걸. 설상가상 일진 채린은 온데간데없고 천사 채린이 자신들에게 진심 어린 용서와 징벌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걔가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됐다고? 어리둥절함도 잠시.” 나미와 선우는 이 선교회의 진실과 채린의 본성도 달라진 게 없음을 알아낸다.
채린의 회개는 진심이 아닌 '착한 일 점수'를 얻어 '낙원'으로 가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종교시설 역시 학교와 다를 바 없는 위선과 차별의 지옥이었고, 채린은 여전히 그곳에서 나미와 선우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괴롭히고 따돌렸다.
피해자의 피해는 그대론데 어떻게 가해자에게 용서라는 구원을 줄 수는 없을까. 둘은 채린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채린의 낙원행이 결정되고 이 선교회는 한바탕 뒤집어진다.
채린의 낙원행에 앙심을 품은 타 교인과의 마찰로 인해 교단의 비리와 사이비 행위가 폭로되고, 채린을 돕던 전도사는 도망치게 된다. 채린과 나미, 선우는 외딴 비닐하우스에 감금되지만, 나미와 선우는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고 잠시나마 통쾌한 도주의 즐거움도 누린다.
다시 동네. 복수도 못 하고 돌아왔지만, 이 여정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지옥 탈출만이 능사는 아니며, 설사 도망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곳이 원하는 완벽한 천국은 아님을.
이상에 비하면 누구에게나 현실은 어떠한 형태의 지옥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기왕 사는 거, 만세를 외치는 수밖에. 엉망진창이어도, 풀리는 일이 없어도, 지옥이어도 그래, 그냥 '만세'다. 살던 곳으로 돌아온 나미와 선우는 기꺼이 웃으며 현실과 맞선다.
영화의 끝, 하지만 성장은 비로소 지금부터 시작이다. 지옥 탈출로 시작한 여정은 "지옥? 만세!"를 외치며 막을 내린다.
돌아온 둘의 상황은 여전해도, 이제 나미와 선우는 서로가 있다. 이 지옥이 이어지겠지만, 둘은 예전처럼 외롭지 않겠지. 영화를 보는 내내 김하늘 시인의 <나쁜 꿈>이 떠올랐다.
나쁜 꿈
캄캄한 그 어디에서도 지금 잡은 내 손을 놓지 마. 네가 실재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해. 우린 불편한 영혼을 공유했잖아. 우리는 미래가 닮아있으니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주머니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칼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는 자해의 흔적까지. 유령처럼 하얗고 작은 발가락까지.
비릿하고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나면 몸에 개미 떼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 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너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난 차라리 다행인데.
유서를 쓸 땐 서로 번갈아가면서 쓰자. 네가 한 줄, 내가 한 줄, 이 개같은 세상에 실컷 욕이나 하고 죽자. 쓸모없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라고. 지상에서 가졌던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면, 그땐 나도 없는 거야. 자주 마음이 바뀌어도 네 자리를 대신하는 마음은 없어. 반성 같은 건 안 해. 밤이 하얗게 번지는 사이 우리가 언제 둘이었던 적이 있었어? 아니, 우린 빗방울이야.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라는 시구처럼, 영화 속 두 주인공도 이제 나쁜 꿈같은 현실을 겪는 게 혼자는 아니다. 이제 지옥을 같이 지나갈 서로가 있다. 그래서 다행이다.
학창 시절은 누군가에겐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라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다. 학창 시절의 문제나 사회에서 겪는 문제나 감상에 젖을 만큼 좋을 고생은 없었다. 이 영화처럼 그래도 견뎌서 이곳까지 이르렀음은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인생에 완성과 완결이란 없다. 또한 지상 위 완전한 낙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게 바로 인생의 멋진 점이 아닐까. 이 세계와 우리는 불완전하고 그렇기에 우리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런 미완과 불완의 상태는 겪는 입장에선 마냥 즐겁지 않겠으나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다면 분명히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지금부터는 미완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눈에 담고 싶다. 조금 더 넓은 시야로.
그러니까 나도, 현생 지옥? 오키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