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벼룩시장에서
서울에 살 때, 나는 오래된 골목을 걷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내려앉은 물건, 빗물에 씻기고 햇볕에 바랜 건축물, 누군가 살다 간 냄새가 배어 있는 공간. 그런 것들 앞에서 나는 늘 발을 멈추었다. 낡은 것은 나를 불렀고, 나는 그 부름에 기꺼이 응했다.
20대와 30대를 떠올리면 기억은 끝말잇기처럼 꼬리를 물고 튀어나온다. 경복궁 돌담 너머로 스며들던 늦가을 햇살. 비 오는 날 이른 시간, 종묘의 적막 속에서 혼자 걷던 고요. 먼지 냄새 가득한 도서관 서가 사이에서 보낸 오후들. 필름이 돌아가기 전 극장의 어둠 속에서 느끼던 심장의 두근거림. 서점에서 우연히 펼친 책의 첫 문장이 온몸을 관통하던 순간들. 빈티지 가게 구석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서 있던 시간들이 내 안에 새겨 저 있다.
그리고 길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길들이 있다. 독립문에서 사직동으로, 체부동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누하동과 누상동의 낮은 지붕들이 이어지고, 효자동을 지나 통인동 기름떡볶이 냄새를 맡으며 옥인동 언덕을 오르면 인왕산 자락이 품어주던 하늘. 계동의 한옥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빛, 세검정 개울가의 물소리, 북촌에서 자하문 터널을 지나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길의 고즈넉함.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새벽, 종로의 밤, 성북동 심우장 앞 돌계단, 명륜동 성균관 은행나무 아래의 가을. 연건동에서 원남동을 지나 삼선교 다리를 건너면 창신동 봉제 골목의 재봉틀 소리가 들리고, 보문동 절집의 풍경 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회현동 남산 아래 골목, 명동의 불빛, 충무로의 인쇄소 잉크 냄새, 을지로 철공소의 불꽃, 오장동 냉면집 앞의 긴 줄, 필동의 계단, 수표동 골목의 적막, 관철동 선술집의 웅성거림, 인사동의 붓 냄새, 청계천 다리 위에서 바라본 저녁놀. 흥인동에서 숭인동을 지나면, 황학동이었다.
온통 아린 빛으로 나를 이끌어 위안이 되었던 것들이다.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고민들을 구원해 주었다.
종로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 청계천을 건너 동대문을 지나 황학동 벼룩시장을 돌던 때도 있었다. 고서점 먼지 속에서 보물 찾기를 하듯 한 권 한 권 뒤적이고, 만화책을 열심히 모으기도 했다. 성동고등학교 담을 따라 황학동까지 이어지던 그 벼룩시장. 동대문 운동장이 사라지고 유선형의 DDP가 들어설 때 잠시 떠돌다, 동묘 앞에 다시 뿌리를 내린 시장이 있다. 골동품 시장, 벼룩시장, 빈티지 마켓 — 이름이야 뭐든 좋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낡은 철제 캐비닛, 촛대. 대체 이걸 누가 사고 누가 파는가 싶은 물건까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시장. 세상의 모든 쓸모와 쓸모없음이 한데 뒤엉켜 숨 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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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도 주말이면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열리는 벼룩시장이 있다. 쌓인 작업이 가득인 남편을 꼬셔 나들이를 갔다. 가운데 수로가 있고 양쪽으로 고목들이 우거진 커다란 공원에 수백 개의 노점들이 가득하더라. 먹거리 마실거리 당연히 있다.
태국의 국화인(카시아(Cassia fistula) 태국어 이름 라차프륵(ราชพฤกษ์, 황금 샤워) 노란 꽃이 가득한 나무 아래로 햇살이 쏟아진다. 그 빛을 받으며 테이블 위에 펼쳐진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기계, 가전, 가구, 그릇, 부처님 관련 불교물품, 하다못해 수전과 파이프 연결하는 플라스틱 엘보까지. 빈티지 옷과 장신구, 신발, 모자, 공예품, 장난감, 액세서리. 세상에 이런 물건도 있었지 하는, 이제는 사용할 일이 없는 집안의 가재도구들 —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호롱불, 숯 다리미. 여기가 한국판 동묘였다.
빈티지 알람 시계들이 알록달록 모여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독일제 자센하우스 커피 그라인더가 빛바랜 라디오와 나란히 놓여 있다. 코카콜라 로고가 선명한 빨간 램프셰이드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살랑거리고, 그 아래로 로터리 전화기며 타자기며 복스런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낡은 트렁크 위에 진열되어 있다. LP판 위에 디즈니 피규어들이 소꿉놀이처럼 옹기종기 올라앉아 있는 모습은, 누군가의 유년 시절이 고스란히 펼쳐진 것 같아 괜히 물끄러미 들여다보게 된다. 대나무 바구니와 칠기, 등나무 공예품들은 태국 북부의 장인 문화가 얼마나 깊은지를 손끝으로 느끼게 해 준다. 한쪽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들이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이고, 그 옆에선 녹슨 자전거 한 대가 카바이드램프를 달고 반세기 전 어느 골목길을 달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벼룩시장의 가치는 물건의 가격에 있지 않다. 누군가의 삶에서 쓰임을 다한 물건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는 순환의 미학이다. 그것은 소비가 아니라 발견이고, 쇼핑이 아니라 고고학이다. 진짜 보물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테이블 구석에 있다. 녹이 슨 양철 상자, 색이 바랜 엽서 한 장, 손때 묻은 도자기 잔 하나. 거기에 깃든 시간의 무게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 벼룩시장은 박물관보다 풍요로운 곳이 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건, 물건뿐만이 아니라 사람 풍경 때문이기도 하다. 태국 사람 특유의 느림이 벼룩시장에서는 더욱 도드라진다. 사거나 말거나, 접이식 의자에 앉아 부채질하며 쉬고 있는 할아버지들. 물건을 펼쳐놓고는 한쪽에서 느긋하게 국수를 먹고 있는 삼촌들. 손님이 와도 굳이 일어나지 않는다. 고개만 살짝 돌려 눈인사를 건네거나, 가격을 물으면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들어 보여줄 뿐이다. 서두름이 없다. 누군가는 오토바이 뒤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와서 느릿느릿 구경하다 가고, 어린 딸은 엄마 옆 간이 테이블에서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블랙 카 커피”라고 쓰인 빈티지 자동차 뒷문이 열리면 그 안에 번듯한 에스프레소 머신이 한 대 들어앉아 있어 웃음이 난다. 여기서는 커피 한 잔마저 느리게 내려진다.
그 와중에 상술은 또 있다. 벼룩시장이라고 다 싸지는 않다. 물건마다 대충 적어놓은 가격표를 보면 의외로 단단하다. 동묘에서는 “얼마에 줘요” 한마디에 반값까지 내려가는 흥정의 묘미가 있었는데, 여기는 크게 흥정이나 디스카운트가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가격을 물으면 태연하게 숫자를 말하고, 깎아달라고 하면 미소만 짓는다. 그 미소가 “안 돼”인지 “알아서 해”인지 모호한 채로, 결국 그 가격에 사게 되는 것이다. 물건에 대한 자부심인지, 태국식 여유인지. 어쨌든 억지로 밀어붙이기엔 이 느긋한 공기가 허락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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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만났던 앤티크 페어가 떠오른다. 돌담 교회 마당에 차려진 텐트 아래, 은수저와 찻잔들, 빅토리안 시대의 브로치들이 벨벳 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풍경.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라벤더 향 사이로 낡은 에나멜 주전자와 린넨 테이블보를 뒤적이며 오후를 보냈던 시간이 따라온다. 파리 방브의 벼룩시장에서 아르데코 램프를 발견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놓아준 적도 있다. 돌아서면서 뒤를 자꾸 돌아보았던 그 미련까지 포함해서, 벼룩시장은 언제나 추억을 만드는 곳이다.
치앙마이의 벼룩시장은 그 모든 추억과 닮아 있으면서도 결이 다르다. 유럽의 브로캉트가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는 느낌이라면, 여기는 열대의 고목 아래 수로를 끼고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느낌이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도 괜찮고, 먼지가 살짝 묻어도 괜찮다. 물건을 못 사도 괜찮다. 그늘 아래 의자 하나 펴놓고 기타를 뜯는 사람 옆에 앉아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발품 팔면 소소한 물건 득템이 가능한 곳. 그러나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이 시장을 걷는 것만으로 이미 무언가를 얻는다. 머리를 식히고, 추억을 여행하고, 시간이 멈춘 듯한 오후를 보내기에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곳이 있을까.
작업에 쫓기던 남편도 어느새 진열대 앞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어울리겠다며 부츠와 미츠비씨 모터스의 점프슈트 작업복을 가리킨다. 이심전심이다. 우와. 나 득템 했다. 이게 바로 벼룩시장이지.
역시 치앙마이다. 사바이 사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