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죽하직

by 이두

막죽하직이란 말이 있다. 경상도 말로 막죽이란 마지막이란 말을 의미한다고 씌여 있다.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이다. 즉 막죽하직이란 마지막 하직을 일컫는 말이다. 서울 놈인 나는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말씀하시는 이 막죽 하직이란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도 마지막이란 발음과 유사한 점을 깨달아 그것이 마지막 하직이란 말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막죽하직이라, 이 말은 마지막 하직으로 서로 멀리 떠나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즉 더 이상 지상에서 만나 볼 수 없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을 앞둔 망자와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쓰는 말이다. 그 말을 쓰신 어머니로서도 그 조상, 선조로 입말로 겨우 받아들였으리라, 입으로 입으로 통해 전달되는 말, 하지만 그 의미가 너무 의미심장하여 아끼고 아끼다가 겨우 꺼내지만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여 어머니는 기억하다가 그 말을 사용했다는 생각이다.


여기 두 가지의 막죽 하직을 기록하고자 한다. 둘 다 아버지와 관련된 막죽 하직의 이야기이다. 부친은 경상도 경주 근방 양남면 사무소에서도 40여 리를 걸어 들어가는 산골 출신이다. 한국전쟁이 이 경주 근방까지 밀려왔을 때, 따져보니 부친의 나이 24살이었다. 전선은 코앞까지 닥치고, 전쟁에 나갈 젊은이들은 부족한 시절이었다. 부친은 52년 초에 집 당하여 56년 말까지 근 5년간의 군대생활을 하고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5년간의 객지 물을 먹은 아버지에게 고향은, 첩첩산중은 살 곳이 못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결혼한 지 다섯 달 만에 전쟁터에 나가 죽다가 살아왔는데, 그 5년을 기다린 어머니를 끌고 서울로 솔가 하여 왔다. 그때가 1956년도 말이었다. 다행히 그때 아버지의 형님, 큰아버지가 미군을 따라서 서울에 와 있을 때라고 했다. 형님 하나만을 믿고 서울로 왔지만 형님집에서 아내를 데리고 하는 곁방생활을 못 이기고 뛰쳐나와 지금의 정릉천변에 날림집을 지어 살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때 중앙산업이라는 종암동의 건설회사에서 등짐으로 시멘트 포대를 내리던 고생스럽던 과거를 말씀하시기도 했다.


하여간 막죽하직의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그때는 아버지와 고향 양남 면을 다니러 가고 있었다. 아마도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례를 치르고 나와 아버지는 그 양남 면의 산골로 향했다. 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를 타고 겨우 선산에 도착하여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에 참배했다. 나에게도 절하라고 했다. 비석 하나 없는 묘소 앞에 우리는 공손하게 절을 했다. 아버지는 평소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앞에 묘비라도 하나 하기를 소원했다. 하지만 그 또한 큰집 사촌들과의 의견일치를 보아야 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말로는 내 증조부 때는 나름 이곳에서 세도를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조상들이 묻힌 묘등 또한 선산으로 아버지도 이곳에 묻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이곳까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국가 유공자 즉,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대전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있기에 선산에 묻힌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여간 선산에 참배를 하고 우리는 하루에 몇 번 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한참만에 왔고, 부친과 나는 버스를 잡아 탈 수 있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버스가 입실 읍에 들렀다. 입실 읍은 버스 노선 중 비교적 큰 지역으로서 정차 시간이 길었다. 한 15분간을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내 잠시 막죽 하직 좀 하고 올 터니....”


부친은 그때 분명히 막죽 하직이란 말을 썼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실의 그 읍사무소 좁은 고샅길로 사라졌다. 그러더니 한 십여 분이나 있었을까 부친은 다시 버스로 돌아왔다.


“내 고종사촌이 있는데, 누워서 오늘내일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차마 그냥 이곳을 지나칠 수 없어서 한번 들여다보고 왔다. 그렇게 건강하던 양반이 이제 정말 뼈만 남았더라...... 사는 게 뭔지, 그래도 막죽하직을 했으니 잊어버렸다.”


그렇게 말하며 부친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부친이 막죽 하직을 하던 첫 번째 이야기이다,


다음 두 번째 막죽하직은 막바로 그 아버지와 나와의 막죽하직이야기이다.


불효자인 나는 부친이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울산으로 이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업하던 컴퓨터 학원이 망하게 되어 수천만 원의 손해를 보았고,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지겠지 하던 그 컴퓨터 학원 사업을 도저히 이끌어 갈 수 없었다. 결국 어렵사리 장만한 부천 역곡의 낡은 빌라를 팔아 빚잔치를 하니 남은 돈이라고는 없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져서 수술도 받지 못하고 집에 누우셨다. 당연히 어머니의 병시중 몫이었다. 처음에는 어찌어찌하여 재활의 가능성도 있어 보였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학박사 홍혜걸은 뇌출혈이라고 말했다. 암은 그래도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고, 적어도 누군가가 자신의 똥오줌을 치워주지 않고 스스로 화장실을 드나들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더 이상의 서울 살림을 포기하고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가고 싶어 했다. 한 푼 없이 서울에서의 삶을 사느니, 형제자매가 있는 울산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최후통첩이었다.

“나와 같이 울산에 내려가지 않으려면 이혼하자이.....”


불효자인 나는 하는 수 없이 울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당장은 방한 칸 구할 돈도 없었다. 나와 동갑인 처형과 큰 동서 형님이 그나마 아내인 여동생을 귀엽게 여겨 형님네 집 옆에 방 두 칸짜리 2천5백짜리 전세를 얻어주어 겨우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천둥벌거숭이로 울산에서 직장을 구해야 했다. 나이는 마흔다섯이었고 할 줄 아는 것은 없었다. 다행히 학교 다닐 때 이수한 교직과목 덕분에 소지하고 있던 교사 자격증이 그나마 구실을 했다. 울산의 국어학원들을 찾아가 문을 두들겨 겨우겨우 국어학원 교사 자리를 얻어 호구로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어 학원 강사는 그렇게 만만하지도 쉽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이제 막 대학을 갓 졸업한 여선생을 선호했지 나같이 늙다리 쉰을 바라보는 학원강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중2학생들이 무서웠다, 중2병이란 말도 있듯이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려 보아도 안되고 달래 보아도 안되고, 나같이 카리스마가 없는 강사는 학생들의 밥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목소리를 크게 하여 강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간고사를 치르는데 여러 반을 들어가게 되어 나중에는 목이 쉬어 버렸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 때 잊고 있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번 올라와야 할 것 같다. 느그 아부지가 오늘내일 한다. 또 할배가 아이들도 보고 싶다고 다 델꼬 온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잊고 있었던 아버지 생각이 그제야 머리를 치며 다가왔다. 아내는 같이 갔으면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고 했다. 두 아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이었다. 나는 두 아이들을 이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아버지가 계신 부천 역곡으로 향했다. 고속버스 안에서도 나는 상념에 잠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은 오랜만의 여행이라 그런지 신이 났다. 그들은 몇 년 전에 떠나온 곳을 기억하고 있을까? 부천 역곡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부천 역곡의 할아버지가 노년의 소일거리로 하던 약수터의 그 농막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역곡 부천의 작은 아파트의 방 한 칸에 누워 계셨다. 침대에 누워 계셨다. 침대는 낡고 오래된 일인용 침대였다. 얇은 훗이불을 걷어 달라고 했다. 그제야 옆에서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가 이불을 들쳤다. 뼈만 남은 허벅지며 종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젊었을 때 그렇게 단단하던 아버지의 허벅지는 가늘어지고 축 늘어져 있었다.


“여보, 애들 왔어요.... 이제 막죽하직이제 언제 또 보겠노.......”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 투박하던 손, 목수 일을 해서 굳은 살이 박혀 단단하던 그 손도 이제 힘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아이고, 이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할베 한번 본다고 왔나......”

하며 부친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나는 그 어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햇수로 따져보니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4년 정도 흘러 고, 내가 부천 역곡에서 울산으로 떠난 지 2년이 흘렀다. 나는 아버지에게 죄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죽음이 눈앞에까지 다가와 있는 부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제야 어머니에게 말하여 돈을 가져오게 했다. 부친의 손을 가늘게 떨렸다. 지갑에서 만원 짜리 지폐를 펼쳐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부디 공부 잘하고 잘살아라.....”


흐느낌 반, 질질 끄는 듯한 목소리 반이었다. 아이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말없이 할아버지가 주는 돈을 받아 손에 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아버지를 껴안아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껴안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데면데면한 부자관계, 그래도 나는 항상 자기소개서를 쓸 때 화목한 가정에서 근면 성실한 아버지 밑에서 잘 성장하였다고 쓰지 않았던가?


막죽 하직도 끝나고 나와 아이들은 터덜거리며 고속 버스를 타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금강 휴게소에서의 일이었다. 금강 휴게소는 서울에서 경남 지방으로 갈 때 많이 들르는 휴게소를 멋진 금강을 배경으로 건물이 서 있어서 풍광이 뛰어났다. 뒤로는 멋진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화장실을 다녀온 후 상쾌한 바람이라도 쐬려는 듯 강이 보이는 배경에서 앞으로 무엇이 즐거운지 소리를 치며 뛰어다녔다.


그때 내 머릿속에 한 시구절이 생각났다. 어려운 시절, 제대로 울 수도 없었던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산에 들어가 통곡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번 더 그 시구를 되뇌었다.


산에 들어가 통곡했다.


막죽하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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