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이 돌아가셨어.... 어제 갑자기 위독한 상황이 되어서 돌아가셨어. 그리 알고 있고 고향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식 전해주렴무마, 장지는 이곳 휴스턴 교회 묘소로 하기로 했어, 고향 선산에 묻히고 싶어 했지만 그것이 어디 그리 쉽게 마음대로 되니, 안되지, 잘 지내고........”
“ 아..... 네..... 부조라도 보내드려하지 않을까요......”
“부조 그런 거 필요 없다..... 그저 소식을 전할 뿐이지........”
까무룩히 잠이 들었다가 전화벨 소리에 깨어 전화를 받으니 그런 말을 숙모님은 전하고 있었다. 카카오 톡으로 하는 전화, 세상 좋아졌다. 예전 같으면 먼데 전화, 전화비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어머니가 말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젠 인터넷만 있으면 카카오톡 음성전화로 얼마든지 전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화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겨우 일 년에 한 번 정도, 그것도 명절을 맞아 마지못해 낡은 전화부를 뒤져 전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세월이 발달하여 이제야 겨우 카카오 음성전화가 나온 것이다.
지난 추석 때 내가 이곳 한국에서 전화를 드렸다. 숙모님은 내 전화를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향에서 걸려온 전화, 그것도 이제는 서로 제 살기에 바빠 멀리 미국에 있는 친척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숙부님은 보청기를 하고 있어 통화가 힘들었다. 하지만 숙모님 말로는 늘 전화를 기다린다고 한다. 고향에서 걸려온 전화, 여든여덟 살이나 되어 고향에 가지 못하고 머나먼 타국에서 일가붙이라고는 아무도 전화하지 않은데, 그나마 나에게서 온 전화가 유일했다. 그래서 명절에 한 번씩 하는 그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지난 전화에서는 삼촌은 잘 지낸다고 했다. 폐에 작은 암이 발견 도었지만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고령의 나이로 그저 지켜볼 뿐이라고 했다. 그때도 삼촌은 고향의 선산에 묻히길 원한다고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결국 휴스턴의 교회 묘소에 모시기로 했다고 숙모는 희미하게 말했었다.
그리고 다섯 달이 흘렀을까? 이 한밤중에 숙모님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런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도 그렇게 한 밤중에 받았다. 그때는 아무런 예상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던 때라 그 황당함과 경황없었다. 하지만 이번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촌이 묻히고 싶다는 고향의 선산? 그곳은 어떤 곳인가? 경북 경주시 입실 부근의 산속에 자리하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할머니의 묘소를 그곳에 하기 위해 간 기억이 있다. 그 후로도 몇 번 어머니와 차를 몰고 가본 적이 있고, 나중에 사촌들과 더불어 벌초한다고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삼촌은 그곳에서 1954년 경 탈출하여 서울로 왔고, 지금은 머나먼 미국 휴스턴에서 돌아가신 것이었다. 1934년 생인 삼촌은 어머니 보다 한 살 어렸다. 어머니가 열여덟 살 먹어 시집이라고 오니 한 살 적은 시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1950년 일어난 전쟁은 이곳 경주 근방에도 치명타를 입혔다. 좌우익 혼란한 가운데 이곳은 파르티잔, 빨갱이들이 판을 치던 곳이라고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에 의하면 낮에 양남면에서 올라오는 경찰들을 향해 고개 만뎅이에서 기다렸다가 총을 빵빵 쏴서 경찰 몇몇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면 또 경찰들이 몰려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양남면 지서에 끌려가 반 죽도록 얻어맞고 풀려나곤 했다곤 했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빨갱이들에게 밥을 몇 번 줬다고 그도 빨갱이가 되었다고 했다. 총을 들이밀며 밥을 내놓으라는데 안 줄 수가 있냐고 말했다.
그때 큰아버지가 한분 계셨는데, 이 양반이 좌익에 가담해서 몇몇 일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백부는 이른바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모든 마을의 보도연맹사람들을 데려다 죽일 때 백부는 요행히 그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백부의 목수 기술 때문이었다. 입실 부근에 진을 친 미군 부대에 백부가 목수로 일을 돕게 되었는데, 미군들에게 솜씨가 좋다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 미군들 덕분에 백부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 스물세 살이던 부친은 어머니와 결혼한 지 석 달만에 군대에 징징당하여 52년경 군대로 떠났다고 했다. 그때 삼촌은 입실 중학교를 몇 년 다니다가 집에서 농사를 돕고 있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백부는 미군들과 서울로 갔다. 그때 들리는 말로는 기술자로 대접을 받으며 미군부대의 지프차를 타고 서울로 입성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 그곳을 미군 지프차를 타고 입성하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때 고향에서 할머니와 형수와 삼촌 세 명이서 살았다 한다. 한 형님은 서울로 미군을 따라서 가고, 다른 한 형님은 군대에 징집되어 가고, 남은 자신은 사람들에게 빨갱이 집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드디어 삼촌 또한 서울로 형님 따라간다고 왔다고 한다. 그 길로 삼촌은 고향에서 멀어져 영영 고향을 떠나오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53년 서울에서 할 일이 삼촌에게는 없었다. 다행히 백부의 주선으로 삼촌은 미군부대에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된다. 이것이 평생 삼촌을 해외로 해외로 이끈 그 시초의 사건이 된다.
여기서의 생활, 하우스 보이로써의 생활은 전해 들은 바가 없다. 삼촌은 여기서 영어를 익혀 그때 50년대에 남산에 세워진 힐톤 호텔에서 웨이터 역할을 하게 된다. 영어가 되는 사람이었으니 이때만 해도 삼촌은 잘 나갔다.
그때 삼촌은 당시 시골 중학교 1학년의 학력으로 당시 서울 모여고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인물 좋고, 가문 좋은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분이 앞서 말한 숙모님이었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나는 어려서 참석하지 못하고 형과 누이가 겨우 어린 네댓 살 정도의 모습으로 결혼식 사진에 찍혀 있었다. 아마도 대략 64년이나 65년경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때 피로연 사진을 찍어 놓았는데, 그것이 칼라사진이었다는 것이었다. 호텔을 배경으로 신랑 신부가 양복과 하얀 신부복을 입고 축하연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 수집장의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들이 왜 우리 집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요즘의 사진 사이즈, 즉 명함 두장 정도의 인화지에 박힌 사진이었다. 사진은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돌았다. 양복 입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술잔을 건네는 모습 등, 아마도 호텔에서 피로연 장소를 빌려 주어서 그런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그 이후로는 삼촌은 집안의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 예를 들면 우리 아버지, 즉 형님이 아파서 사경을 헤멜 때, 서울 대학병원에 입원시켜 준 사람이 삼촌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말로는 간에 염증이 생겨 그렇게 힘들었다고 했다. 그때 병원을 물색하고 입원시켜 준사람이 삼촌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젖먹이로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 침대에서 떨어져 그렇게 심하게 울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말하며, 정 피우고 싶으면 통에든 파고다 담배를 사다 준 사람도 삼촌이었다고 한다. 검색해 보니 60년대에는 파고다 담배가 최고급 담배로 가격은 40원이나 했다고 한다,
70년대에 삼촌은 서울에, 아니 한국에 없었다. 그때 당시 할머니를 둘째인 우리가 모시고 계셨는데, 가끔 숙모가 할머니, 즉 시어머니를 뵈러 왔다. 그러면 숙모는 삼촌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내가 듣기로는 삼촌은 미국회사가 운영하는 유람선을 타고 다니면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 유람선에는 없는 게 없이 모든 게 있는 꿈의 유람선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해외 관광 크루즈 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70년대 초반에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돈벌이를 하고 결국에는 온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길에 올랐다. 내가 고3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삼촌은 미국에서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자 한국으로 나왔다. 그때 찍어놓은 사진이 낡은 사진첩에 남아 있다. 머리 두건을 쓰고 형님과 그리고 고모들과 찍어놓은 사진이었다.
하여간 삼촌은 집안의 희망이자 등대였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미국에 있는 너그 삼촌한테 가서, 미국물도 좀 먹고 미국 대학도 좀 다녀보는 것이 어떻냐.........”
그 이야기를 나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못하고 빌빌 거릴 때 항상 하던 말씀이었다.
아버지의 성화로 우리는 추석 때면 항상 미국의 삼촌에게 전화했다. 그 전화번호가 적힌 아버지의 손때 어린 수첩이 지금도 생각난다. 전화받는 곳은 집이 아닌 장소였다. 작은 가게, 이민온 사람들이 꾸려가는 작은 가게,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편의점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업원이 받을 수도 있어서 이렇게 전화했다.
“디스텔러폰 프롬 서울, 아이원트 스피크 이진규......”
그러면 저쪽에서 삼촌을 바꾸어 주곤 했다.
그렇게 통화를 하곤 했다. 멀고 먼 휴스턴, 시차가 14시간이나 나는 곳이었다.
그 이후 어떤 기회를 삼촌이 사는 미국 주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주소를 바탕으로 구글에서 지도 검색을 하고 삼촌이 사는 집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휴스턴의 다 똑같은 전원주택, 차고지가 있고, 2층의 그저 야트막한 집한 채가 보였다.
우리 집안의 히어로, 중학교 1학년의 학력으로 그 멀고 먼 미국 땅에 가서 발붙이고 집 한 채 마련해서 살고 계셨다. 숙모의 말로는 하던 장사도 노년에 그만두고 오로지 텃밭 가꾸기에 온 힘을 쏟고 계셨다고 했다.
구글은 휴스턴의 맑은 날씨와 투명한 공기를 보여준다. 그 아래 똑같이 배열된 주택단지 한 채에서 삼촌은 살아가셨다.
이곳 한국에서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이제 멀고 먼 미국 땅에서 우리 집안의 히어로 삼촌의 부음을 이제야 듣고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향 선산에 묻히고 싶다던 소망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삼촌이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