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이 동대문이다. 잘 봐두레이”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버스는 동대문 주변을 삐두르미 돌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무릎 사이에 앉아 그렇게 창 밖의 동대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크고 낯선 건물이었다. 버스 등받이에 놓인 손잡이를 잡고 어머니의 그 다정한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평소의 엄마는 물론 그렇게 다정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국민학교 3학년 생이었던 아들을 미취학 아동이라고 속여 버스비를 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키가 작았다.
“보소, 이 쬐매한 놈도 버스삯을 받는단 말이오, 말도 아니네, 아니 이 아가 어디 보아서 학생인가요. 아직 젖먹이구마”
“하이고, 하여간 국민학생들은 반 값이라도 내야 되어요”
어머니는 한사코 나를 버스 안으로 밀어 넣으며 본인 차비만 계산했다. 마지못해 운전사는 눈을 감았다. 자리가 나서 어머니는 재빨리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어머니 무릎사이에 끼어서 가고 있었다. 동대문은 그렇게 내 눈에서 서서히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소공동이라고 했다. 무언가 우리가 사는 종암동과는 차원이 다른 듯한 어감의 동네 그곳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까막눈의 어머니가 그 먼 길을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그곳에 미국 제일은행, 아메리카 퍼스트 은행이 있었다.
까막눈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평소 어머니는 얼마나 열심히 한글 공부를 하는지 몰랐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을 붙들고 언제나 씨름하셨다. 쓰고 읽고, 그래도 시원스레 어머니의 국어 실력은 늘지 않았다. 그래도 본인은 버스 옆구리에 붙은 행선지를 한 번에 보고 잘 안다고 곧잘 말하곤 했다.
“내사 척 보면 알지, 저 버스가 어데로 가는지, 행숙이 아지메 있제, 나보다 더 모르는 기라, 이기 어디로 가는지, 그거 하나만 해도 나는 배웠다 아니가”
어머니가 늘 주장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특별히 더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아들을 의지로 삼아 길을 나서기, 국민학교 3학년 아들을 삼아 어머니는 길을 나선 것이다. 그나마 한글 해득을 한 아들을 의지삼아 종암동에서 소공동까지, 아름답다는 미국제일은행, 아메리카퍼스트 은행을 찾아 나선 것이다.
물어 물어서 우리는 소공동에 있는 미국 제일은행에 도착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 은행, 1971년경의 그 아메리카퍼스트 은행에 대한 느낌은 이랬다. 넓은 고객 공간을 마주한 직원들의 공간은 은은한 간접광으로 빛났다. 빛났다고 하지만 그저 은은한 불빛만이 넘쳐났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마치 유령인 양,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닌 그저 바닥을 스치듯 날아다녔다. 빛을 직접적으로 쏘아내는 전등들은 없고 그저 무슨 유리로 된 크리스털, 늘어진 크리스털에서 간접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로지 알전구에서 빛을 쏘아내는 우리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요했고, 무슨 피아노 소리가 낮게 깔려 공간에 퍼지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주뼛거리며 한 미모의 여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손에는 아버지가 보내준 수표가 들려 있었다.
“이것을 찾으려 하는데요”
어머니가 말했다. 여직원을 두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한 창구를 알려 주었다.
그 창구에서는 어머니가 내민 수표를 보더니 말했다.
“저희가 발행한 수표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수표는 아메리카퍼스트 은행 발행수표였다. 일반 은행에서는 환전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이 은행까지 물어물어 오게 된 것이다. 수표는 어떻게 우리 손에 들어왔을까? 그때 아버지는 미국 괌 섬에 목수인 노동자로 일하러 갔었다. 나는 매번 아버지에게 항공 우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항공 우편은 최저가로 미국으로 가는 편지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세로로 길쭉한 그 종이를 두 번 접으면 그것은 편지 모양의 장방형의 모양이 되었다. 그 펼친 안쪽에 편지의 내용을 적으면 되었다. 편지는 매번 내가 썼다.
아버지 받아보세요. 이곳의 저희들은 잘 지낸답니다. 산에는 진달래가 발갛게 피고 벚꽃도 환하게 피었습니다. 그간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시는 지요.
까막눈이던 어머니는 편지를 내가 혹은 누나에게 쓰라고 했다. 그렇게 편지를 쓰면 그 항공우편은 거의 1주 정도 후에 미국 괌 섬에 도착했다. 지금은 괌 섬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구암도라고 아버지는 발음했다. 구암도
그 멀고 먼 구암도에서 그 수표는 날아온 것이었다. 일종의 우리 가족이 한 달 내지는 여러 달을 살아야 하는 돈이기도 했다.
이윽고 창구에서 기다린 끝에 두툼한 현찰을 어머니는 거머쥐게 되었다. 그 돈을 어머니는 치마 안 쪽의 속바지 주머니에 감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버스를 타도 다시 온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든든히 들어 있는 돈, 그제야 어머니의 얼굴에 온기가 돌았다. 항상 가난 걱정에 찌들어 있던 어머니였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대문을 돌 때 나에게 그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이 동대문이다. 잘 보아 두레이”
그 목소리가 근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