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의 일부분이다. 첫사랑 그녀는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 무수한 상념이 시작하는 말이다. 노래 제목도 재미있다. 낭만에 대하여. 인류 역사를 통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믿음은 낭만주의 이후 시대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이외의 시대는 모두 사랑이 무슨 소용이냐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한마디로 정략결혼으로 또는 부친의 권유로 하는 결혼이 대다수였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동네 사는 처가 쪽 사람이 총각이 좋아 보인다고 외가에 권유하여 결혼한 케이스였다. 이런 결혼을 하여도 다들 이혼 없이 다들 아들 낳고 딸을 낳고 잘들 살았다. 그러나 사랑 타령을 하는 현시대에 와서야 이혼율이 거의 40프로대를 찍는다는 아이러니는 무엇으로 설명할까. 내 첫사랑의 소녀들, 생각나는 대로 따라가 보자
국민학교 5학년 경이었다. 그때는 초등학교라고 하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였다.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단발머리인데 머리모양이 특이했다. 아마도 부모가 미용 계통에 종사하는 듯했다. 단발머리보다는 짧은 커트 머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다. 머리는 똑똑하고 친구들 사이가 좋았다고 기억한다. 그즈음 친구들 사이에서는 도는 말이 있었다. <너는 좋아하는 여자애 없냐, 혹은 둘이 만나본 적이 없나> 이런 말들을 하며 우리는 킥킥 웃었던 것 같다.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그녀랄까.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다. 그녀였다. 이름도 생각난다. 정 아무개였던 것 같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점심시간이면 먼발치에서 그녀가 뛰노는 모양을 지켜보고는 했다. 그때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아침바다 고깃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이런 노래를 부르며 여자애들이 고무줄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고무줄을 늘여 두 명이서 서 있고 그녀가 깡충깡충 뛰어오르는 모습을 난 멀리서 지켜보고는 했다. 나도 어려서는 동네에서 그 고무줄놀이를 했었었다. 고무줄을 늘여 놓고 박자에 맞추어 한 발씩 고무줄을 밟고 다시 다른 발로 바꾸어 밟는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곤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또 한 명의 첫사랑 소녀가 있었다. 그것은 내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고1 때 내 절친인 동창 놈이 한 소녀를 소개해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러고 보면 조숙했다. 조숙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것이 유행이었다. 몇 번을 만났다. 생각난다. 청량리 역전에 있던 빵집인 나폴레옹인가 하는 데서 만났다. 그 빵집은 역전 광장의 끝 부분에 있었었다. 지금 청량리에 가서 보니 그 광장은 모두 사라지고 민간업자들이 지어 놓은 다락같은 건물들 안 높이 솟아 있었다. 그 당시 남녀 학생들이 만날 수 있는 곳은 빵집 이외에는 없었다. 쑥스러워서 말도 못 하면서 한 번인가 두 번인가 만났다. 나폴레옹 빵집에서, 무슨 빵을 시킬까 무슨 말을 할까 항상 고민이었던 시절이었다. 공부는 뒷전이고 여학생이나 만나러 다니고 나도 애초에 싹수가 노랬다.
고등학교 2학년이 지나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2 때는 이과였는데 고3 때 문과로 옮겼다. 당시 문과는 10반 중 2반 이과는 8개 반이 있었다. 고 2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공부를 안 했다. 문과에 와서 보니 다들 공부하는 자세부터가 달랐다. 치열했다. 나도 고3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당시 혜화동에 있던 모교는 도서관이 잘되어 있었다. 고3만을 위해 특별히 도서관 뒤편으로 고3 전용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 학교 수업이 끝나고 공부를 했다. 도시락을 큰 것을 싸서 가서 반을 점심때 먹고 반은 남겨 저녁에 근처 분식집에서 떡라면을 하나 시켜 그렇게 같이 먹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10시경에 컴컴한 운동장을 바라보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나 안 죽었다. 나 아직 안 죽었다> 가끔 혜화동 로터리가 내려다 보이는 중학교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담뱃불만 발갛게보였다.
그해 오월은 80년 5월이었다. 선생들은 말하기를 조심했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어도 선생들은 아, 너희들은 공부나 열심히 해라 하고 말했다.
1년을 죽어라고 공부한 끝에 운 좋게 예비고사에서 생각보다 좋은 성적이 나와 나는 서울의 중상급의 대학인 C대학의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합격이 결정되고 나서 나는 친구의 이모를 통해 그녀가 경희대 근처의 어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물어 물어 그곳을 찾아갔다. 그때는 묘한 객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경희대는 내가 사는 청량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서서 잘 알았다.
대학교 앞의 카페는 한산했다. 나 이외는 아무도 손님이 없었다. 밖에는 차가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먼저 전화를 하고 몇 시경 찾아간다고 말했다. 그녀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단 둘이 마주 앉았다. 나는 역시 그때까지 쭈볏대며 말을 못 했다.
“잘 지냈어?”
“너는……”
“나야 뭐 공부한다고 …….”
“대학교에 들어갔다는 소식 들었어…”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 취직자리를 잡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조금 살이 빠진 듯 여위어 보였다. 전화가 두통인가 왔다. 나는 그때 카페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앞에 카운터가 있었고 내가 앉은자리를 그 카운터에서 약간 떨어진 좌석이었다. 좌석 옆쪽으로로는 바깥으로 난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에서 바깥 겨울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카페의 한 가운에 놓인 스토브 난로에서는 주전자의 물이 끓고 쎅섹 소리를 내었다.
오랜만이었다. 그럴 것이 서로가 공부하고 한다고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나도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탁자에는 그때 내가 들고 간 다이어리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말이 없는 순간이 길어지니 그녀는 그 다이어리를 펼쳐 맨 마지막 장에 고운 글씨로 적어 주었다.
C 대학 경제학과 이두
그것이 그녀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카페를 나온 후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를 다시 찾지 못했다.
첫사랑 그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하고, 지금 와서 가끔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