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최초의 기억은 있다. 모 소설가는 자신의 최초의 기억을 불이라고 했다. 온통 눈앞의 붉은빛을 보았고, 기억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컸을 때 비로소 자기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겨우 6개월 정도의 나이에서 겪은 최초의 불이라고 했다.
나는 어떤가? 나에게 그것은 불이 아니라 물이었다. 어떤 물인가? 커다란 물항아리, 장독이 놓인 부엌이었다. 부엌의 한쪽에서는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물 항아리를 투과하였고, 물항아리에서 반사된 빛은 부엌의 천장에서 아롱거리고 있었다. 물그림자와 빛 그림자를 따라 일렁거린다 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 항아리 주변을 나는 누이인가, 아니면 형인가 하는 아이와 서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이다. 희한하게도 나와 그 작은 아이 하나를 보는 것이다. 물 항아리 아래에서 둘이가 무언가를 소곤대는 광경, 이것이 내가 느끼고 있는 최초의 기억이다. 이것은 대략 내가 네 살에서 다섯 살의 나이로 1966년에서 1967년쯤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 부엌이 있는 집에 대해서 우선 설명하여야 할 듯하다. 집은 일자로 지어진 집이었다. 방이 두 개 부엌이 하나 있었다. 부엌은 방 두 개의 가운데 놓여 있었다. 부엌의 양 옆으로 부뚜막이 있고, 아궁이가 있었다. 그곳에서 불을 지펴 양 방의 방에 난방을 하는 구조였다. 부엌문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로 걸쇠를 하는 구조였다. 그 나무와 나무가 만나는 걸쇠 부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 물항아리는 작은 방, 그러니까, 안방의 맞은편 쪽 부뚜막, 들어가는 입구 쪽에 놓여 있었다. 부엌문을 열면 아궁이 이와 바닥은 낮은 위치에 있었다. 부엌 입구에서 부엌 바닥으로 가는 길에는 섬돌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부뚜막 위에는 안방으로 작은 문이 나 있었다.
이 집은 어떤 집인가? 그것은 정릉천 변에 지어진 무허가 판자촌 집이었다. 고려대학교 정문에서 대략 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청량리 역전에서도 대략 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였다. 이 정릉 천변 무허가집은 당연히 아버지가 지었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서 죽다가 살아오셨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퇴부 수류탄 파편을 맞아 겨우 후방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아버지가 1956년 근 6년 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하였다. 결혼은 49년에 하였었고, 고향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옛집을 지키고 있었다. 전쟁을 경험한 부친은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세상을 보았을 때, 경주 입실에서도 근 40여 리를 들어가는 촌구석에 자신의 청춘을 묻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고향에서는 뺄갱이 집안이라고 낙인까지 찍혀서 서울로 이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큰아버지, 아버지 형님 되시는 분이 고향에서 좌익 운동을 하셨다. 그 결과 백부, 본인은 보도연맹에 가입하였고, 마을을 다른 청년들도 다수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 죽였을 때 백부는 용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백부의 목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전쟁 당시 미군부대가 경주 부근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백부는 목수 기술자란 이름으로 이 미군 부대를 무상으로 출입가능하였고, 그 미군들 덕분에 백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백부는 9.28 서울 수복 시에 미군 지프차를 타고 폐허가된 서울로 입성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랬으니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로서는 마을의 청년들을 보도연맹으로 죽게 만든 집안의 일원으로 백안시당한 것을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이렇게는 못 산다는 생각에 형님을 따라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 형님 집으로 오게 된 것이 아버지의 서울 진출기였다.
그렇게 형님 집의 사랑방에서 근 두 달을 버티다가 드디어 이 정릉천변의 무허가 집을 짓고 독립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할머니도 와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잠시 우리 집안에 대해 내가 아는 대로 써보자. 나는 청안 이 씨 낙의재 파의 22세 손이라고 족보에 적혀 있다. 낙의재는 임진왜란 당시 월성 부근에서 가솔들과 사촌들을 규합하여 창의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이라고 나온다. 일명 천사장이란 깃발을 내세우고 월성 부근에서 큰 명성을 떨쳤다 한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낙의재 항목이 다음과 같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효경』과 『논어』를 배웠고, 학문보다 실천이 중요함을 알아 효제(孝悌)를 행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 집 종들과 주민·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천사장(天使將)’이라는 기를 앞세우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郭再祐)와 화왕성(火旺城)에서 합세하여 적을 공략하였고, 통제사 원균(元均)이 패전하여 죽은 뒤에 진을 월성으로 옮겼다.
그해 9월 대구의 팔공산싸움에서 왼팔에 적탄을 맞았으나 전세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 뒤 사재를 털어 병화와 흉년으로 시달린 백성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낙의재에 모아 충효의 길을 가르쳤다. 그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낙의재 유집』 2권이 있다.>
낙의재, 이 분은 9세 손이고, 내가 22 세손이다. 대략 13세 후손이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친다면 대략 390년 전, 400년 전의 이야기이다. 400년이 흐른 후 집안은 좌익, 그것도 보도연맹이라는 올가미에 빠졌으나 용케도 살아 나왔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서 그나마 생환하셨다. 이후 전쟁에서의 그 공훈을 인정받아, 화랑 무공 훈장을 수여하셨고 현재 대전 현충원에 누워 계신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날품팔이로 서울 살이를 살았다. 종암동에 중앙산업이라는 건설회사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저녁 나절 나아가 시멘트를 트럭에서 내려 한 곳에 쌓는 일을 했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으로 치면 쿠팡에서 일명 <까대기>를 하는 것과 유사한 일이었다. 그 후 형님을 따라다니며 목수일을 배운 아버지는 평생을 목수로 사셨다. 생각난다. 지금도 아버지의 작업복에서는 늘 나무 자른 냄새, 즉 나무 냄새가 났다. 그래도 나는 늘상, 아버지의 직업을 목수로 할까, 건축업으로 적을까 고민했었다.
다시 그 정릉천 변의 집 이야기로 옮겨 가보자. 부친은 그 집을 짓고 형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무허가 집일지언정 서울 하늘아래 등을 붙일 집을 만든 것이었다. 부엌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방이 두 개 있었다. 방 두 개는 부엌의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난방을 하였다. 그 작은 방 앞에 놓인 물 항아리가 그러니까, 내 최초의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 물항아리에는 마을 공동 수도에서 물 초롱으로 물을 져다가 그곳에다 부어서 식수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 물항아리가 놓여 있는 풍경이. 나무로 된 부엌문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그 햇빛은 물항아리를 내려 비추고, 그 물항아리의 물그림자는 다시 천장으로 반사되어 천장에서 일렁거리고 있다. 부엌은 어둡고, 아궁이는 더 어두웠다. 그 물그림자, 이것이 내 최초의 기억이다. 그때 형이던지 누이였던지와 나는 무슨 말을 속삭였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