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치가 왜 강한지 아는가? 탈주했기 때문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로 대표되는 AOS (Aeon of Strife) 장르 게임을 접해보았다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농담이다. 다섯 명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여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도록 설계된 게임에서 한 명이라도 탈주하면 전황이 급격히 불리하게 흘러간다. 뭇 게이머들의 공분을 사게 될 일이지만 탈주한 자가 강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때 소위 ‘원나블’의 한 축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만화 <나루토> 시리즈는 어느덧 연재 시작 후 20년이 넘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스토리 상 비중은 크지만 등장 빈도는 저조한 데다 사망한 지 오래인 이타치가 정확히 왜 강한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열혈 팬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엄격한 규칙과 위계에 의해 유지되는 닌자들의 작은 국가에서 명문가 출신인 동시에 정보기관에 근무하던 이타치는,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본인의 씨족을 몰살한 뒤 정규 편제에서 벗어난 용병 집단에 들어간다. 이른바 ‘탈주 닌자’가 된 것이다. 원래도 닌자로서의 역량이 뛰어나고 가문의 비기까지 두루 섭렵한 인재였으나, 탈주 후 모든 규제로부터 벗어난 덕에 자객으로서 극한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타치의 탈주 행위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왜 탈주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해이다. 잔혹한 동족 살해자의 오명을 쓰고 옛 동료들에게 비난받던 이타치는 극이 전개될수록 후한 재평가를 받는다. 개국 이래 숱한 전공을 세웠으나, 탄압에 가까운 견제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내전을 준비 중이던 일족이 공권력에 의해 토벌되기 전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국가적 혼란을 막는 동시에 극소수나마 살아남은 일족이 다시 번성할 가능성을 내다본 것으로 그려진다.
바보 같음, 생각 없음이 주인공의 덕목인 《소년 점프》류 만화에서 이타치는 극도로 드물게 사고할 줄 아는 인간이다. 실상 그에게 주어진 것은 공권력의 편에서 일족을 처형하거나 일족과 함께 국가전복을 시도하는 두 가지 가능성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절멸에 가까운 비극이 예상되는 여건 속에서 그는 탈주라는 제3의 길을 발견했다. 탈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욕망과 권력의 기존 배치를 우선 정확히 파악한 뒤, 이 역학관계를 배반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방식이 바로 탈주이다. 탈주라는 함축을 애용한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의 대표주자인 현대철학의 거장 들뢰즈(1925~1995)가 자살을 조금만 미루고 이타치를 만났다면 어떤 크로스오버가 탄생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허구의 닌자 사회처럼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선택을 요구받는 삶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이타치처럼 탈주를 택할 지혜와 용기, 결단력을 지닌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돈이 없어 라면만 먹으면서도 투혼을 불태워 승리하는 운동선수, 묵묵히 자신만의 색깔을 낸 끝에 빛을 보는 언더그라운드 예술가에 이어 이제는 주로 모바일 게임 회사의 젊은 대표나 명문대 출신의 스트리머까지, 모두 각 시대를 닮은 탈주자의 양태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은 탈주가 아니라 전직을 한 것이다. 열정이 넘치는 점은 물론 인정해야 하지만 고찰이 있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말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 말하던 대로 일각에서 먼저 변화의 조짐이 보일 때에는 무엇이 잘나서 다들 힘들게 사는데 혼자만 특권을 누리냐며 반대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특권을 나눠주고자 하는 거의 모든 시도에 대해서는 급진적∙전복적이라며 마다한다. 언젠가 혁명 없이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낙관만을 지속할 뿐이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탈주할 공간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이타치가 왜 강한지 아는가? 탈주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