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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민 Jan 06. 2021

무해한 20대 남성을 위한 변명

어느 조직에서든 경험이 부족한 신입을 대상으로 직무교육을 할 때, 뻔히 보이는 상부의 비리를 못 보는 체하면서 에둘러 지시하다 보면 반드시 실수를 유발하여 결국 상급자가 수습해야 한다. 어린이 대상 성교육도 마찬가지이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을 회피하려 하면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한국 20대 남성이 공유하는 소위 역차별과 소외의 정서는 이미 마이너리티 자의식을 공고히 형성한 지 오래이다. 언제까지고 일시적으로 창궐한 일종의 반문화로만 보는 축소해석을 계속한다면, 한국 사회는 또 한 차례 아파르트헤이트와의 지난한 소모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각국 정부는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유 없이 행인을 구타해서는 안 된다. 한결같이 당위 명제이다. 소수의 ‘관종’이 반대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두루 통하는 상식에 가깝다. 당위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다면 ‘까임 방지권’으로 순화해도 어색하지 않다. 한국형 20대 남성 마이너리티 자의식에 대한 거의 유일하게 유의미한 접근이었던 지난해 <시사IN>의 ‘20대 남자 현상’ 프로젝트는 당위 명제의 붕괴에 주목하였다. ‘남녀의 소득이 비슷한 사회가 공정하다’와 같이 기계적 성평등에 대한 질문은 본래 내심 반대하더라도 거짓으로 긍정하게 마련인 당위 명제였다. 하지만 동성의 기성세대와 달리, 500명의 20대 남성 중 반 이상은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히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이들 전원이 진정 ‘일베충’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남성 전체가 아닌 20대 남성이 유독 젠더 이슈에 민감한 현상에 대해 이제는 일베 잔당의 건재 과시 이상의 해석을 내놓아야 한다.


20대 남성은 그 선배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신인류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 남성이 현재의 보편 정서에서 얼마나 동떨어진 존재였는지를 직시하는 잔혹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삼촌에서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남성들은 극소수의 행운아를 제외하면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지속적인 실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다. 독재정권에 의한 고문이나 특수부대의 훈련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각 조직에서의 상급자는 물론 교사나 친구에 의해서도 지금 당장 재판한다면 최소 1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피해 가지 못할 폭력이 일상적으로 반복 재생되었다. 혹자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며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조야하게 말해 자유롭게 반론을 제기해도 ‘처맞지’ 않는다는 확신을 지니는 시점에서 이미 그 실체를 모른다 단언할 수 있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자는 구호가 더 이상 공허한 외침에 그치지 않고 구체화되면서 유사 이래 거의 처음으로 맞거나 때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남성이 출현했다. 사람은 골절되고 차량은 찌그러질 정도로 주먹을 휘두른 학생은 보통 대가를 치렀다. 일부는 여전히 눈물 젖은 돈가스를 먹었지만 모두가 이유도 모른 채 포경수술을 받은 뒤 자연산인 친구를 따돌리지도 않았다. 남성을 보통 늑대에 비유하지만, 면제권을 돈으로 사지 않더라도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짐승으로 변신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휴먼 남성의 숫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비로소 평범한 인간에 가까워졌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인수(人獸) 모드 변신을 못하는 휴먼 남성은 아직 생소한 종족이다. 


젠더 담론을 극도로 정교하게 다듬지 않으면 이 무해한 휴먼 남성들에게도 선배들이 저지른 패악에 대한 속죄의 쇠사슬을 나누어지도록 강요하게 된다. 대다수의 상식적인 20대 남성은 대학에서 만난 친구를 강간한 적도, 직장에서 동성의 후배를 구타하고 임금의 일부를 상납받은 적도 없다. 늑대인간의 통치기에 종지부를 찍고 함께 인간의 왕국을 세워보자며 손을 내밀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남성이기 때문에 우선 족쇄부터 채운다면, 2차 종족 전쟁은 정해진 미래나 다름없다. 이미 젊은 보수를 자처하는 일부 기성 정치인들이 전쟁을 부추기고자 혈안이 되어있다. 좌파가 피로스의 승리를 자축하며 방심하던 사이 유럽 각국을 휩쓸고 간 극우의 해일은 대개가 고학력의 젊은 남성층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한국도 결코 쓰나미 안전국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증오는 대개 무지에서 시작된다. 절대다수의 젊은 남성들이 다분히 정상적인 시민사회의 일원임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들과 삼촌들이 부득이하게 당하고, 또 자행해야 했던 수많은 폭력의 실상에 대해 우선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도 남자’라는 이유로 어머니와 언니들이 겪은 것에 비해 덜하지 않은 그 숱한 구타, 인신모독, 금품갈취, 성희롱과 간통의 역사를 아우슈비츠 기념관으로 삼아야 한다. 나치 간부 및 부역자와 네오나치를 적대할 수는 있지만 독일인 전체를 전범으로 삼을 수 없다. 신중해야 한다. 네오나치와 일반 시민을 정확히 가려내지 못하는 젠더 담론은 네오나치즘만큼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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