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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발견

by 김영근

필라델피아


이웃 도시 필라델피아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던 엊저녁이었다. 내가 사는 델라웨어 주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운동팀으로 꼽는 첫 번째가 미식축구로는 Philadelphia Eagles요, 야구로는 Philadelphia Phillies 농구로는 Philadelphia 76 ers이니 여기도 어찌 보면 범 필라델피아 상권에 속한다 할 게다.

필라델피아는 내게 아직도 낯선 이웃 대도시이다. 이젠 그 이름이 많이 쇠락했다만 한 때 필라델피아의 한인거리로 알려졌던 5가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1970년대 동두천이나 의정부로 데려가곤 한다.


개인적인 일로 필라를 찾는 일은 이젠 거의 없다. 좋은 벗들과의 만남이 있는 날들이면 어쩌다 올라가곤 하는데 일 년이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엊저녁엔 정말 오랜만에 필라 시내 한 복판 건물 숲 속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참 좋은 벗의 아들이 장가가는 날이었다. 필라 시청에서 가까운 빌딩 숲 속, 분수대 앞에 펼쳐진 예식장은 초가을 맑은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아 아늑했다. 필리핀계 가톨릭 의식에 따라 진행된 예식은 부부의 연(緣)에 대한 뜻을 아주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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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에 이어 건물 50층에 있는 연회장에서 바라본 필라시 전경은 이제껏 내가 그리고 있는 필라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필라시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저녁은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벗들로 하여 풍성하기까지 하였다. 티 없이 맑고 밝은 신부의 쾌활함이 그 아름다운 저녁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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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있어야 할 몇몇 벗들이 함께 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엊저녁 비슷한 시간에 펼쳐진 중국인촌 행사에 우리 풍물놀이패로 참석한 탓이었다. 어제 아들 장가를 들인 벗도 아들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그 풍물패와 함께였을 것이다.


그렇게 멋진 저녁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데 주머니 속 지갑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주차장에서 나올 때 지갑을 꺼내 카드로 결제를 하고 나온 기억이 선 하건만 양복 주머니 속에도 차 안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나는 허둥거렸다. ‘하이고~ 이를 어쩌지….’ 하며 쯧쯧 거리고 있는 사이, 아내가 ‘쯔쯔쯔…’ 더 크게 혀를 차며 지르는 소리였다. “여깄 고만… 왜 그리 덤벙거리시나!” 지갑은 차 시트 사이에 떨어져 있었단다.


하여 떠올린 지난주에 읽었던 책 캐스린 슐츠의 <상실과 발견> 속 한 대목이다.


<조사기관과 보험사 데이터에 따르면 우리는 저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대략 아홉 번 물건을 찾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60세가 되면 거의 20만 개의 물건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잃어버린 물건들을 전부 다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물건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다. 평생 동안 우리는 사라진 물건을 찾느라고 대략 6개월의 시간을 꼬박 소모한다. 이는 미국에서 집단적으로 하루에 5400만 시간을 소모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돈도 지출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한 해 약 300억 달러가 오로지 잃어버린 휴대폰 때문에 사용된다.>


그녀가 이 책을 쓴 게 2022년도이니, 지금은 그녀가 말한 수치들은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까.

잃어버려 아쉬운 물건들과 결코 되찾을 수 없는 시간에 더해 정말 아쉬워야 하는 것 바로 잃어버린 기억들이 아닐는지.


어제 식장에서 함께했던 벗들과 풍물패로 거리에 나선 벗들과 종종 함께하며 같을 뜻을 찾고자 같은 몸짓을 하는 친구들을 이어 준 끈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나이 차이로 보자면 거의 한 세대 간격이 벌어지는 이들이 함께하는 모임이다. 더러는 민주, 통일, 평화, 이민 등등 저마다 주관심사들에 있어 작은 차이들은 있다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서로가 존중되는 안전한 사회를 꿈꾸는 일에는 같은 생각을 지닌 벗들이다.


나는 비록 늦은 나이지만 벗들을 통해 많이 깨우치며 산다. 이젠 돌아서면 쉽게 잃어버리는 기억들로 홀로 혀 차는 시간들이 늘어간다.


하나 참 좋은 벗들과의 연대는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아름다운 필라의 저녁을 만끽하게 해 준 이종국선생 내외에게 감사를. 이종국선생을 축으로 같은 뜻으로 이어진 참 좋은 벗들에게 고마움을.


상실과 발견, Lost & Found


이런 날은 참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초가을 마음이 마냥 여유로운 하루, 손에 든 책에 완전히 빠져 든 날에 누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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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쉰이고 제법 이름 꽤나 알려진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라는데 나는 그녀의 책이 처음이다. 케서린 슐츠(Kathryn Schulz)가 쓴 <상실과 발견, Lost & Found>이다. 책에 쉽게 빠져 들게 한 요인 중 하나일 게다. 바로 번역자 한유주 덕이다.


300여 쪽 제법 긴 자전적 에세이에 엉덩이 몇 번 들썩이지 않고 반나절 빠져 지냈다. 몸에 받으면 좋은 영양제가 될 듯한 가을 햇빛과 그 볕으로 나는 열을 식혀주곤 하는 마른바람은 오늘 내가 누린 복을 더했다.


내 초기 이민 생활에 큰 힘이 되었던 월트 휘트만(Walt Whitman)의 시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이 덤으로 내게 준 행복이다. 에세이를 읽으며 post-it flag들을 이리 많이 붙여 보긴 처음인 듯하다. 그만큼 내가 빠져 시간을 보냈다는 징표일 게다.


책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문장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C의 아버지, 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딜 보나 평범한 사람치고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아온 것 같아” C의 아버지는 실내 배관이 없는 집에서 자랐고… 그는 평생을 농부로, 식료품점 점원으로, 관리인으로, 경비원으로 일했고….>


내 또래일 작가의 배우자 아버지에 대한 묘사인데 세탁업이 평생 직업인 내가 종종 이즈음 읊조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우리는 놀라운 삶을 살아간다. 삶 자체가 경이롭기 때문이다.>

<상실은 일종의 외부적 의식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날들을 잘 사용하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들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가을의 초입, 나뭇잎들은 물들기 시작했고, 성미 급한 녀석들은 이미 떨어져 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을빛에 더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들도 있고, 이제 막 피려고 봉오리 맺는 놈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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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은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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