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다 똑같이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성서를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 안병무
수년 전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생각납니다. 호주에서 삼십여 년 이민 목회를 하시다가 이제는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계절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에 감사하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꽃 피고 새소리 상쾌한 아침, 문득 떠오른 카드에 대한 추억입니다. 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인 셈입니다.
천국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이왕이면 꼭 한 번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 한 분이라도 제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전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제 생각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나 “맞다, 틀리다”의 잣대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전제입니다. 다만 “같다, 다르다”라는 관점으로 읽어 주시면 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일테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탈애굽을 한 일단의 히브리 노예족들이 광야로 나와서 한 달 반쯤 이후에 터져 나온 불평과 불만들을 출애굽기와 민수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12, 17:1-7, 민 11:1-6, 14:1-3 등등)
불평과 불만의 주된 내용들은 “배고프다, 고기 먹고 싶다, 목마르니 물 달라”라는 사람들이 살기 위한 아주 기본적 욕구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훼 신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므리바 반석의 물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운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이런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해석하고, 따지고, 묻는 사람들의 성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믿음, 신앙, 종교 등에 대한 태도들 역시 비슷할 것입니다.
물론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또는 종교 무관심론자들은 별 뜻 없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사람 사는 모양이라는 게 다 저마다 다른 법이니, 관심 있는 이들을 이렇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지요.
첫째는 있는 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다 주시고, 반석에서 때아닌 생수를 쏟아내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고, 성서의 기록은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동시에 오늘날 자신들이 신뢰하는 과학이라는 것으로도 검증 가능하다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 째는 그런 기록들은 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당시 탈출 노예들의 수를 다 먹일만한 메추라기 떼가 날아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이론을 들이대거나 지금도 시내광야에 가면 연지벌레로 인해 생기는 만나와 똑같은 먹을거리를 볼 수 있음으로 만나란 단지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는 신앙적 고백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가 자연적 현상이던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던 그것의 중요성 곧 역사적 사실 여부의 중요성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험을 어떻게 고백했느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고백을 믿고 공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입장은 비단 종교적 관점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무리들에게 야훼는 “내가 준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부나 불평을 늘어놓던 무리들 누구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내린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며 야훼가 일하셨다고 믿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제가 글을 쓰고 이야기하는 관점입니다.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만났고, 오늘도 만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만날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 연재를 이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 3-4, 공동번역)>
탈애굽한지 달 반이 지나서부터 탈출 노예부족인 히브리족들은 하나님께서 차려 주시는 밥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메추라기 고기가 곁들여진 만나로 차려진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 메뉴는 그들이 가나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약 4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출 16:35)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누구도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을 것을 거저 주는 나라라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거저 주되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 공평한 밥상에 둘러앉는다는 것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히브리족들에게 보여주신 천국 곧 하나님 나라 모습입니다.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의 수는 당시 군인이 되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만 약 60만이 넘는 무리였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민수기 1:46)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12지파 별로 수를 셉니다. 레위지파를 제외한 11지파의 군대 종사 가능한 인력들의 수를 세고 대표를 뽑습니다.
무리들 가운데 총우두머리인 모세와 부장이자 최고 참모이자 대변인이었던 아론을 위시한 지도부가 있었고 그 아래로 12지파로 나누인 지파 지대장들과 참모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계질서가 잘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분명 야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권력 소유의 차이가 존재했고, 지위의 차이가 존재했고, 권력 소유와 지위 차이에 따른 해야 할 일들의 명확한 규정과 책임들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에 관한 한 누구도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는 절대 평등의 밥상을 나누었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음식의 질뿐만 아니라 먹는 양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 각자가 배부를 정도까지만 똑같이 먹을 수 있는 무상급식을 신이 베풀었다는 애굽탈출 노예들의 고백이 바로 성서의 기록입니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두 번째 모습은 바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밥상입니다.
성서는 이런 아주 공평한 밥상의 모습을 두 군데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만나 이야기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습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행전 2장 44-46, 공동번역)
여기에서 우리가 아주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이 바로 출애굽기 16장 35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지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끝나는 기간이 있었다는 말이고 그 기간이 사십 년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이후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교회의 모습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 곧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먹고 나누는 모습도 한정적인 기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시내산 십계명과 광야에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신과 히브리족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들과 신약시대 초대교회 신도들의 공동생활이 한세대나 두세 대에 걸쳐 철저히 믿고 지켜졌을 것이라는 추론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하거니와 저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이 지나자 사람 사는 사회에서 이런 절대 평등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 두 가지 경우의 절대평등의 모습 이외에도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역사 가운데는 유사 절대평등의 노력들이나 시도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과 시도들도 한세대나 두세 대를 넘어서 이어진 예는 거의 없습니다.
이 절대평등의 역사적 경험은 종말론적 삶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기에서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종말론적 삶의 공동체가 무엇일까?
우리들이 나누어야 할 다음 이야기입니다.
신의 무상급식법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밥상을 지배하는 법입니다. 바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짜와 절대평등의 밥상법입니다.
이제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 지난주에 이웃한 뉴저지 체리힐 극장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흥행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습니다만, 그중 한 가지엔 (비록 폐위되었을지언정) ‘왕’과 ‘천민’이 같은 밥상에서 함께 나누는 식사 장면에 대한 관람객들의 공감도 한몫하지 않았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