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인

어느새 스무 해 넘게 흘러간 일이다. 그 노인을 만난 곳은 워싱턴 DC부근 그의 집에서였다.

쉰 나이를 넘길 무렵 나는 헛바람이 단단히 들어 뉴욕에서 워싱톤까지 뻔질나게 오가곤 했었다. ‘아무리 이민이라지만 세탁소에서 내 인생을 다 보내야 하나…?’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헛바람이었다. 그 헛바람은 내 인생 또 하나의 굵은 실패 자국만을 남긴 채 몇 해 만에 꺼졌다.

그 무렵에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다. 제법 성공해서 정말 어마어마한 부를 이룬 사람부터 노숙인으로 거리를 헤매는 사람, 숱한 사(師, 事, 士) 자 직업군들과 영어 한마디 뱉지 못하고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사람들, 워싱톤 정가에서 제법 이름 날리던 의원들과 보좌관들, 남북한 고위 관리부터 허망한 헛 기세에 절어 사는 사람들까지, 물론 나처럼 헛바람에 혹 하지 않고 작은 생업에 충실한 이민들까지 정말 다양한 계층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다.

비록 그때 그 헛바람의 후유증으로 정말 오랫동안 참 아프게 앓았었다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야말로 아둔한 나를 깨우는 신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니며 산다.

그 시절에 만났던 한 노인의 이야기다.

이북에 고향을 둔 그가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넘어온 때는 해방 후, 남북의 경계가 제법 심해진 1948년 가을 즈음이었다. 그 남하길에서 그는 가족을 하나 잃었다. 그리고 터진 한국전쟁. 남하 후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노인은 이른바 ‘포항 전투’로 잘 알려진 전장에 학도병 막내로 참전하였다.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되었으며, 13명이 포로가 된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노인은 어찌어찌 이민을 와서 주류 판매업을 하며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나는 노인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몇 차례 그의 집을 찾았었고,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녹음테이프에 그의 이야기들을 담아 그 테이프들을 전해 받아 보관하고 있다.)

노인에게 이북 빨갱이 놈들은 철천지 원수였다.

그런 노인에게 1980년 광주 학살을 끝낸 전두환이 미국을 처음 방문했던 때, 전두환을 규탄하는 재미 동포들은 그저 쳐 죽여야 할 빨갱이들이었다. 당시 노인은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동포들을 규합해 ‘전두환 대통령 방미 경호단’을 자비로 조직하고 경호대장을 자처했다고 하였다. (당시 뉴욕에서 그 발대식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엔 노인은 그 일들을 매우 부끄러워했었다. (그의 이야기와 기록에 따르면 그 무렵 노인은 당시 전두환의 최측근이자 이른바 쓰리 허(許)중 한 사람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던 듯하여, 그의 행위가 자발적이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만 그 무렵 그가 매우 부끄러워한 것은 그의 진심으로 느껴졌다.)

아쉽게도 노인은 이야기를 다 남기지 못한 채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즈음 한국 뉴스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으로 떠올려 본 노인 생각인데 내가 어느새 그때 그 노인의 나이 즈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덧붙였던 말,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차고 넘친다. 이즈음 한국 뉴스들을 보면.

차라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부끄러워했던 그때 그 노인은 위대했다라고나 할까?

때론 꽃과 새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까닭이다.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밑바탕 내 마음 깨우치는 신이 주신 도구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