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팔라는 안내, 노인 시설 및 노인 주거지 광고, 각 정당들의 정치 캠페인, 한눈에 얼핏 보아도 사기임에 분명한 돈 불려 준다는 광고들, 노인들을 위한 식당광고 등등 이즈음 우편함을 열면 기다리고 있는 우편물들이다. ‘봉투는 버리지 마요! 쓸 일 있을 테니…’ 머릿속에 꼭 박힌 아내의 잔소리 엄명에 잘 길들여져 내용물만 쏙 빼내어 쓰레기통에 버리며 중얼거리는 말, ‘에이고 아까워라. 종이에 인쇄, 우편비에…. 쯔쯔쯔.’ 이럴 땐 나는 영락없이 돌아가신 아버지다.
그 가운데 거의 한 달 남짓 버리지 못하고 들여다보며 ‘질러… 말아…’ 망설이며 간직하고 있는 광고지가 있다. 아직 아내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그야말로 이즈음의 내 고뇌이다. 쉽게 버리지 못할 추파를 이어가는 광고는 ‘전기로 가는 노인용 세발자전거’다. 전기로도 가고 페달을 밟아 움직이기도 하는 세발자전거다. 공원 등에서 노인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고, 가까운 장 보러 갈 때도 아주 유용하다는 선전 문구가 유혹을 던진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두 발 자전거를 운전하려고 타 본적이 평생 한 번도 없다. 유년 시절에 타보았던 세발자전거가 유일한 내 자전거 경험이다.
그리고 두 발 자전거. 자전거를 태워주던 동네 형이 하나 있었다. 국민학교 입학 전이었으니 먼 옛날 일이다. 내 고향 신촌은 그야말로 촌이었다. 기와집, 초가집, 판잣집이라고 부르던 루핑집, 짚가마니 멍석이 대문이었던 굴집 등이 마구 뒤섞여 살았던 촌이었다. 서울 서쪽의 버스 종점이었던 노타리 부근엔 다방 불빛이 훤했지만, 굴레방다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 언덕 바람산 부근에는 무밭과 호박밭, 그리고 거지들이 산다는 텐트촌이 있던 그야말로 촌이었다.
안산 쪽에서 이화여대 후문을 거쳐 신촌역 앞을 지나 동광약국 앞 신촌시장을 가로질러 흐르던 개천 위에는 나무와 짚더미로 얼기설기 짜놓은 다리들이 있던 진짜 촌이었다.
그 개천가와 다리들을 건너며 노타리에서 연세대 먼지 풀풀 날리던 황토 운동장까지 어린 나를 품은 듯 안고 자전거를 태워주던 동네형, 이젠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나를 태우고 달리던 형의 자전거가 모질게 곤두박질친 일이 있었다. 다치거나 아팠던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날, 그 형이 내 어머니 앞에서 절절매던 기억과 느닷없이 터져 쉬지 않았던 내 울음은 어설픈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 형이 고등학교 이학년 때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그 해 봄 사월이었다. 나는 해방 이후 사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던 학제의 마지막 세대였다. 내 다음 학년부터 삼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으므로.
입학 후 학교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 등의 질서 교육과 체조와 유희 등등의 교육을 받다가 교실을 배정받아 들어가는 첫날, 4월 19일이었다.
교실은 많지 않고 아이들은 많아 오전, 오후반이 나누어져 있었다. 오후반이었던 나를 재촉했던 이는 어머니였다. ‘얘야, 부지런히 가거라. 세상이 숭하단다. 한눈팔지 말고 학교로 곧장 가거라. 어서 어서!’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한 채, 학교로 가는 큰길을 건너려고 노타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엄청나게 커다란 사람들 물결을 만나서 나는 한참을 꼼작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 문(門) 안으로 문안으로 바로 광화문과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 시위대의 물결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어른들은 무섭고 흉흉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총소리를 들었다거나, 사람들이 여럿 죽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자전거를 태워주던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그는 고등학교 이 학년이었다. 내 기억 속, 가까운 사람의 첫 죽음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 본 적이 없다. 탈 줄도 모른다.
칠십 줄에 망설인다. 전기로 가는 세 발 자전거를 살까 말까?
이젠 다른 세상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