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시대, 어떤 자본주의를 선택할 것인가-3
듣기엔 그럴듯해 보이는데, 정확하게 무슨뜻인지 말하려 하면 참으로 애매한 말 중 하나가 바로 경제민주화다.
김종인씨에 대해 경제민주화의 상징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지만 솔직히 그가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디테일이 참으로 애매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재벌 개혁과 견제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장하준 교수와 코드를 공유하는 정승일 박사의 책 누가 가짜 경제민주화를 말하는가는 한국에서 논의되는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는 꽤 대담하고도 진보적인 책이다.
장하성, 정운찬과 김상조, 전성인과 박상인, 최정표 같은 학자들, 그리고 김종인과 박영선같은 정치인들은 한국에서 경제민주화의 아이콘으로도 통하지만 저자의 눈에는 가짜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이들이다. 재벌을 견제하는 것만으로 경제를 민주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999~2010년의 11년은 김대중-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집권 기간이었고 이들 정부는 모두 노동시장 유연화의 이름으로 위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전체 근로소득자의 80%가 실질임금이 줄거나 또는 정체된 그 11년 동안 한국경제는 매년 3~5% 성장했고 노동 생산성도 그만큼 계속 높아졌다.
월급 받는 근로소득자들간에 빈익빈 부익부가 진행된 기간의 대부분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통치 기간이며, 이명박 정부 통치 기간도 일부 포함된다. 이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이어받아, 계속 추진하고 있는 각종 시장주의적 구조개혁이 최종적으로는 가장 부유한 최상위 1%, 또는 0.1%의 부와 소득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자본주의를 더욱 자본주의 답게 만드는 시장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깨끗하고 투명한 자본주의, 약간의 복지와 약간의 노동권을 가미하되 공정한 시장 질서, 또는 경쟁적 시장 질서를 주축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다워질수록 그 경제는 인간과 자연을 더욱 착취하며, 빈익빈 부익부와 함께 환경파괴가 심화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불평등 심화와 가진 자들의 갑질 횡포의 배경에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의 심화가 있다. 약자인 을에게 가해지는 갑의 횡포와 착취는 대한항공과 남양유업같은 대기업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중소기업과 영세기업, 동네 카페와 마트 주인들이 그 종업원과 알바생들에게 가하는 횡포와 착취, 인권유린과 약탈 같은 갑질 역시 묵과할 수 없는 수준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봉건적이고, 중상주의적, 전근대적인 재벌 그룹과 관치경제가 온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21세기 선진국의 모스인 자유시장 자유주의로 전환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제테크가 판치는 자본주의는 자본 축적의 초기 현상이기 보다는 자본 축적의 말기적 현상이다. 주식을 가진 자들만이 경제 민주화의 주체로 등장하는 주주민주주의는 대한민국 상위 1% 부자들만의 민주주의 즉 귀족민주주의다.
야당의 경제관과 기존의 경제민주화론을 대표하는 장하성 같은 경제학자들은 재산 및 재산소득이 아니라 근로소득의 양극화가 모든 양극화와 불평등의 주범이자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1960~80년대의 시기, 1990년대 중반 이전의 시기에 달성된 상대적으로 공평했던 소득 분배와 빠른 경제성장의 비결을 국가 주도 개입 주의 또는 중상주의에서 찾는 경제학자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드물다.
종업원 또는 노동자를 노비취급하면서, 마구 때리고 욕질하는 졸부들의 갑질 행태는 재벌그룹 오너 일가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재벌 기업 오너들에서, 중견기업 및 중소기업 오너와 그 후계자들에서 널리 목격되는 현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가짜가 아니라 진짜 경제민주화라 할수 있을까?
경제민주화보다 훨씬 넓고 깊은 경제민주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직장내 인권과 근로소득을 높이고, 근무시간을 줄여, 저녁과 휴가, 여가가 있는 삶으로 귀결되는 경제민주주의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직장인들, 노동자들의 힘과 권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과 국회, 정부가 모두 나서서 중소벤처기업과 영세 소기업에서 근로기준법 준수 감독과 노동권 및 인권 신장, 노동조합 설립, 지역별 산업별 단체 협상의 법적 의무화에 집중해야 한다. 이들이 모든 회사에서 임금을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월 300만원 이상 올리고 하루 10시간 이상, 주 5일 이상의 근무를 법률로 금지시키는 정책을 단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스웨덴과 독일,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유럽에서는 대기업, 중소기업 상생 정책과 불공정 하도급 규제 같은 국가정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들 나라의 대기업이 착하고 자비로운 천사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유럽에서는 강력한 산별, 지역별 노동조합과 산업별 단체 혁상, 그리고 국가적 복지 확대를 통해 동일한 산업, 업종내의 대기업 중소기업간 임금 격차와 사내 복지 격차, 즉,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화 문제를 원천 봉쇄하였다.
우리 사회는 근로소득 격차가 큰 상태에서, 재산소득의 쏠림 현상까지 가중돼 소득 불평등이 극에 달한 상태다. 소수에게 물려 있는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 앞으로 진행될 세계사적 대전환의 주역, 혁명적 변화의 주역은 바로 삼포, 오포, 청년들이다. 이것이 피케티가 말하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의미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이끄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들의 80%를 차지하는 중소, 영세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노동운동을 일구는데 실패했다.
따라서 노동운동이 청년 알바와 식당 아줌마들, 그리고 대기업, 중소기업 사내 하청과 비정규직, 그리고 중소 영세 기업에 근무하는 정규직들까지 포함하여 이들을 형제애의 정신, 즉 사회 연대의 정신으로 조직하지 않는 이상, 그들을 지역별 산업별로 조직하여 업종별, 지역별 최저 임근 인상과 국가 복지 확대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상, 대기업-중소기업간 임금 격차는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이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어떻게 600~900만명에 이르는 월급 150만원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들을 최소한 월급 300만원 이상 받는 정규직 중산층 노동자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곧 연 110~165조원 이상의 근로소득이 비정규직 또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분배되게 만드는 과제이다. 재벌그룹 개혁과 대중소기업 동반 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야권의 경제민주화 프레임은 불과 연 10조 내외의 금액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말해주는 바는 알바와 비정규직,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신장시키는 지역적, 산업적, 사회적 연대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 운동의 권리를 법제도로 합법화하여, 대기업-중소기업 기업주들및 경영자들에게 노동권과 인권 그리고 지역별 산업별 단체 교섭을 강제하는 법제정 및 재정 지원에 정치권이 나서지 않고서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집권 세력의 정치적 구상과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연 10조원, 나아가 연 110~165조원의 근로소득이 알바와 비정규직,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에게 새롭게 분배되는 세상은 꿈도 꿀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1920년대에 처음 논의되었던 경제민주주의는 공정한 노사질서에 대한 담론이다. 197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다시 활발하게 전개된 경제민주주의 역시 공정한 노사질서 또는 산업민주주의에 관한 담론이었다. 여기서는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을 돈없고 자본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어떻게 기업과 산업, 국민 경제차원에서 확보할 것인지를 중시한다.1주1표, 1원1표의 원리르 근간으로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아니라 1인1표의 원리를 근간으로하는 민주주의의 가치관이 기업과 산업, 국민경제차원에서 관철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노동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기업의 모든 중요 의사 결정 단위에 참여하는 기업 지배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산업 차원에서는 산업별로 조직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업주협회와 공동으로 해당 산업을 통치하는 산업 구조를 만들다. 시장 경제를 관리하는 경제적 지배구조인 한국은행, 금융위, 공정위, 노사정위, 방통위 등에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등 사회 공동체 대표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하자. 회사의 이사회는 사장과 경영진을 선출할 권한이 있다. 만약 노동자 이사들이 반대한다면 특정 사정 후보의 선출을 저지할 수 있다. 경제민주주의의 본질을 이렇듯 산업민주주의와노동권 또는 종업원 권리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179~335조원의 신규 국가복지예산을 새로이 마련하지 않고서는 알바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를 포함하는 모든 평민들에게 만족할만한 수준의 노인연금과 아동수당, 청년 구직수당과 실업수당, 초중고 및 대학의 공교육 질적강화, 선진국 수준의 주택복지와 도시계획, 선진국 수준의 건강보험, 을 제공할 수 없다. 폴란드, 이탈리아 수준으로 개선하는데 필요한 수준이다.
물론 우리가 오늘내일 당장에 프랑스, 스웨덴 수준의 복지국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할수는 없다. 먼저 1단게로 향후 5년간에 걸쳐 폴란드, 일본 수준의 복지국가에 도달하고, 그 다음 5년뒤 에는 이탈리아, 독일 수준의 복지 국가에 도달하는 과정을 기획해보자. 그리고 다시 10년뒤에는 프랑스, 스웨덴 수준의 복지국가에 도달하는 20년에 걸친 대장정을 기획해 본다. 20년에 걸친 5개년 계획, 인간 개발과 공동체 개발을 위한 계획 경제가 필요하다. 그간 우리의 민주정치와 진보정치는 헬조선 탈출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거대한 전환의 꿈과 희망의 국가비전을 제시하고 청년들에게 그길을 함께 가자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스웨덴과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들에서는 우리같은 공정 거래법상, 원하청 규제가 없다. 그런데도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협력이 특별한 이슈로 제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럽의 벤츠나 에릭슨, 필립스같은 글로벌 대기업들이 아주 양심적이고 자비로워서 납품 단가를 후하게 쳐주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앞서 보았듯이, 그들도 납품 단가를 매년 인하하자고 요구한다. 더구나 가능하다면 더 후려치고 싶어한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시장 경쟁속에서 자비로운 기업이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나라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을까?
바로 강력한 산별, 지역별 노동조합과 산업별, 지역별 단체 협상의 법적 의무화를 통해 산업, 업종 내에서의 대기업-중소기업간 임금 격차, 즉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 문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웨덴과 덴마크 등 서유럽 복지 국가들의 대부분 이렇다.
대공황 시기인 1930년대에 집권한 미국의 루스벨트 민주당 대통령 정부, 같은 시기에 집권한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한손 총리 정부가 그랬다. 그리고 히틀러 나치당의 패망 이후 독일 민주공화국 역시 그렇게 하였다.
독일에서는 1940년대말부터 노사 공동 결정체를 시행하고 있다. 60년 넘게 정착된 제도이다. 대기업의 경우 이사의 절반이 주주 대표이고, 다른 절반이 노동자 대표이다. 스웨덴에서는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 구성원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의 힘을 키우자는 점에서 정승일 박사의 메시지는 엎서 소개한 책 '자본주의를 구하라'의 저자 로버트 라이시와 상당 부분 비슷해 보인다.
자본주의를 구하라와 누가 가짜 경제민주화를 말하는가를 보면 경제민주화는 재벌 견제를 넘어 자본 자체를 견제할 수 있는 정치와 사회적인 힘을 키워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구도로 경제민주화를 바라보는 것은 좁은 시각이다. 정승일 박사, 로버트 라이시 모두 유럽식 사민주의를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의 대안으로 보는 것 같다.
재벌 견제에 많은 비중을 두는 장하성이나 김상조 교수 등은 정승일 박사나 장하준 교수의 경제민주화론에 대해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꽤 있을 것이다. 내공이 짧은 나로서는 장하성이나 김상조 교수 얘기 들으면 그말이 맞는 것 같고, 그러다 정승일 박사나 장하준 교수 얘기 들으면 또 그말이 맞는 것 같으니 이래저래 아리송할 뿐이다. 내가 계속해서 경제민주화를 둘러싸고 장하성-김상조, 정승일-장하준의 4자 끝장 토론이 열려야 한다 주장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