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2019년 자국 반도체 관련 소재 및 부품, 장비 업체들에 한국 수출을 금지하는 카드를 뽑아 들 때만 해도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큰 타격을 입을 거란 예상이 많았지만 생각보단 피해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반도체 삼국지'를 봐도 일본 정부 조치가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결산을 해보면 일본 반도체 소재, 부품 회사들이 더 큰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9년 일본이 대한국 반도체 무역 및 기술 제재에 돌입하면서 주요 부품, 장비, 소재의 한-일 공급망 일부가 일시에 마비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수개월간 주요 공급처의 재설정, 신규 도입된 소재나 장비의 테스트 및 숙련 기반 구축 과정에서 비용의 급상승을 감당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많은 부분이 다른 공급처로 대체되거나 국산화된 이 시점에도 공급망의 재조정으로 인한 비용의 상승분이 그리 많이 감소되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국산화 성공이나 공급망의 다변화라는 이점도 누릴 수 있었지만 사실 그만큼의 비용 상승은 한국 반도체 업체 전체로는 경쟁력의 약화를 의미했으며 2019년의 일본이 이것을 획책한 것이라면 일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급망의 부분 붕괴는 사실 일본에 더 큰 손해를 안겨주었다. 한국의 큰손들이 일본 업체들의 제품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일본 업체들의 설비 투자는 고스란히 비용이 되었고 자금이 제때 회수되지 않으면서 일본의 반도체 장비, 소재, 부품은 재고율이 높아졌다. 이는 많은 일본의 중소 반도체 업체들의 비용 급상승을 야기하기도 했으며, 버티다 못한 일부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아예 한국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로의 편입을 위해 생산 기지나 R&D 센터를 발 빠르게 한국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형 반도체 업체 외에 자율주행 기술 확산 속에 현대자동차 같은 곳들도 앞으로 반도체 를 많이 구입할 것임을 감안하면 한국에 공장을 짓는 해외 반도체 소재, 부품 회사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
한국 업체들과는 2019년 8월 이후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주요 소재 수출 규제 조치로 인해 협력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이 조치로 인해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 분야 반도체 생태계가 되려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출 규제 조치가 발표되자 한국의 업계는 그간 일본 의존도가 높았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품목의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간 한국의 반도체 대기업과 공급망을 형성하던 일본의 관련 업체들의 수익성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자 한국의 반도체 업체가 일본으로 진출하기는 커녕 한국으로 직접 수출을 못하게 된 일본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회사들이 한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2019년에는 간토덴카 공업 같은 중소 규모 소재 회사가 한국 공장에서 생산을 개시했으며 다이요 홀딩스 같은 부품 회사는 2020년 5월 한국에 신규로 400만 제곱미터 규모의 공장을 세우기 위해 자회사 다이요어드밴스트머리리얼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다이요는 반도체 초미세 패터닝 공정의 핵심 소재인 솔더 레지스트 분야에서 80~90%를 점유하는 세계적인 업체이다. 이외에도 많은 일본 기업들이 생산기지 한국 이전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소재나 부품 업체들 입장에서는 비단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업체만이 아니라 향후 현대-기아차 그룹의 자율주행 자동차나 사물인터넷 등 한국 시장이 더 성장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포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사실 한국에는 일본 업체 뿐만 아니라 다른 해외 업체들도 반도체 소재 부품 관련 공장을 신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