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 부문이 경제를 주도하는 이른바 탈산업화 패러다임이 선진 경제를 상징하는 키워드라는 시각에 대해 경제학자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순느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 탈산업화 패러다임은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장하준의경제학레시피에서도 이같은 입장이 강조돼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사례로 들었는데, 서비스가 강한 나라처럼 보이지만 스위스와 싱가포르 모두 실제로는 제조업 경쟁력이 튼튼하다는 것이다.
스위스가 만들 줄 아는게 초콜릿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 거기에 더해 백만장자, 은행가, 스포츠 스타나 살 수 있는 말도 안되게 비싼 손목시계도. 스위스는 물건을 거의 만들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해서 먹고 사는 나라라는 시각이 널리 퍼져 있다.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스위스가 제3 세계 독재자들이 빼돌린 돈을 은행에서 비밀리에 관리해주고 뻐꾸기 시계나 소 워낭 같은 조악한 물건을 순진한 일본인이나 미국 관광객에게 팔아서 살아가는 나라라고 할 것이다. 이보다 긍정적이고 더 널리 퍼진 견해는 이 나라가 탈산업 경제의 모범으로 제조업보다는 금융과 고급 관광 상품 같은 서비스 산업을 통해 번역을 이룬 나라라는 것이다.
탈산업 시대에 대한 이런 식의 시각은 1990년대에 힘을 얻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부자 나라 경제 체제에서 생산과 고용이 어느 쪽으로 따져도 제조업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서비스 부문의 역할이 커지는 현상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탈산업화라고 한다.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산업 국가로 부상하면서 탈산업 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제조업은 중국과 같은 저기술, 저임금 국가가 담당하는 산업인 반면, 금융, IT서비스, 경영 컨설팅 같은 고급 서비스에 미래가 있고 특히 부자 나라들은 이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서 스위스는 가끔 함께 등장하는 싱가포르와 더불어 서비스 부문을 특화해서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
서비스 강국으로만 보일지 몰라도 스위스와 싱가포르 모두 제조업 경쟁력도 갖추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싱가포르도 제조업 비중이 크다는 것은 잘 몰랐던 사실이다.
탈산업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위스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 정도가 높은 나라로 1인당 제조업 생산량 세계 1위를 자랑한다. 메이드 인 스위스라고 적힌 상품이 많이 보이지 않는 건 부분적으로 스위스가 작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생산재라고 부르는 기계, 정말 장비, 산업용 화학 물질 등 우리 같은 보통 소비자가 접할 수 없는 물건들을 주로 생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탈산업 사회의 성공담으로 꼽히는 또 다른 나라인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산업화된 국가라는 사실은 흥미로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위스 성공의 비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행이나 고급 관광 상품이 아니라 세계 최강의 제조업 부문이다. 사실 초콜릿 분야에서 쌓은 높은 명성마저 제조업 부문의 혁신에서 기인한 것이지 초콜릿 바를 사는데 은행이 복잡한 할부 구매법을 제시하거나 광고 회사가 멋진 광고를 하는 식의 서비스 산업 덕분이 아니다.
탈산업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근래에 일어나는 경제 변화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탈산업화가 되는 주요 원인은 수요의 변화가 아니라 생산성의 변화다. 이 사실은 고용을 통해서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제조 공정이 점점더 기계화되면서 같은 양의 물건을 생산하는데 같은 수의 노동자가 필요 없게 되었다.
생산의 역학은 좀더 복잡하다. 이 나라들의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하고 서비스 부문의 중요성이 증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탈산업 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공산품에 대한 수요보다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절대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주로 서비스 부문보다 제조업 부문의 생산성이 훨씬 더 빨리 높아지면서 서비스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더 비싸졌기 때문이다. 지난 10~20년 사이에 외식 비용에 비해 컴퓨터와 휴대 전화가 얼마나 저렴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
저자에 따르면 제조업은 서비스 경쟁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더러 혁신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탈산업화의 신화와는 달리 공산품을 경쟁적인 가격과 품질로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한 나라의 생활 수준을 결정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금융, 운송, 경영 서비스처럼 제조업을 대체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고생산성 서비스 중 많은 부문은 제조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서비스의 주 고객이 제조업 부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조업은 아직까지도 기술 혁신의 가장 주된 근원지다. 제조업이 경제 생산량의 10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미국과 영국에서 마저 연구 개발의 60~70%가 제조업 부문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독일이나 한국처럼 제조업 부문이 더 강한 나라에서는 이 수치가 80~90퍼센트다.
우리가 이제 탈산업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은 미국과 영국에 특히 해를 가져왔다. 1980년대 이후 이 두나라, 특히 영국은 제조업 부문을 방치해왔다. 제조업의 위축이 산업 경제에서 탈산업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착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정책 입안자들에게 제조업 부문의 쇠퇴에 대한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핑계가 되어 주었다. 지난 몇십년 사이 영국과 미국의 경제는 과도하게 복잡한 금융 부문이 주도하는 경ㅈ에 체제로 변신했지만 금융 경제는 결국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로 붕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