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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light Sep 01. 2017

신좌파와 자유주의자의 차이를 생각한다

[북앤톡]왕따의정치학

조기숙 교수가 쓴 왕따의 정치학에선 신좌파라는 말이 언급된다. 유럽에선 좀 쓰인다는 말이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생소하다.


신좌파는 기존의 좌파,  조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구좌파, 우파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부류다.


"신좌파의 시각으로는 구좌파와 우파가 권위주의적이란 면에서 차이가 없다. 신좌파는 좌우를 모두 부정하기에, 탈권위주의적이고 탈물질적이며, 탈이념적이다. 문화적으로는 리버럴하고, 경제적으로는 실용적이며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지식도 많다. 부당한 권위를 부정하지만 대인 신뢰가 높고 기부도 잘한다. 정치적 의사 표현이 적극적이라 시위에도 적극 참여하며, 유머를 즐기고 정치를 문화의 영역으로 승화시킨다."


책만 보면 조 교수가 말하는 신좌파와 흔히 생각하는 자유주의자의 차이가 뭐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큰틀에선 신좌파는 자유주의자에 포함되는것 아닐런지..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탈물질적이라는 말은 경제적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돈보다는 다른 무엇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의미인지도 헷갈린다. 조 교수에 따르면 탈물질적인 성향의 국민 비중이 클 수록 민주주의도 발달한다고 한다.


"유럽각국의 국민중 탈물질주의자의 비율을 측정하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도를 알수 있다고 한다. 둘의 상관관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유럽의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고 하는데 그 나라 국민중 탈물질주의자 비율은 60~70%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탈물질주의자 비율이 경제발전 수준에 비해 굉장히 낮은 나라 중 하나다."


한국과 핀란드의 차이는 복지 수준의 차이일 것이다. 복지수준이 높은 핀란드에선 탈물질주의자 비중이 높고, 먹고사니즘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은 한국은 민주주의 수준이 낮다는 의미일 것이다.  탈물질주의적이 신좌파가 늘어나기 위해서는 한국은 복지 국가를 지향해야 하는 셈이다.


신좌파는 조 교수의 눈에 구좌파로 분류될 거 같은 88만원세대의 공동저자 박권일씨에 의해서는 좀 다르게 해석되는것 같다. 다음은 박권일씨 칼럼집 소수의견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수십만의 시민이 광장에서 두 소녀를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든 2002년, 당시 거리로 뛰쳐나온, 10대, 20대, 30대 들이 인터넷 시대의 주역이자, 이른바 노풍, 노무현 신드롬의 중심에 선 세대였다. 그들이 지금의 2040 세대가 됐다. 이들 세대애 공통적인 이념적 기반 같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들 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이질감은 엄청나다. 이들으 거의 유일한 공통 기반이 있다. 바로 미디어 리터러시다. 2002년 촛불, 2004년의 촛불, 2008년의 촛불에서 공히 드러난 특징이다. 트위터와 같은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도 그들은 당시 가장 첨단에 있는 미디어를 활용해 사회적 변화를 주도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네트워크로 연결된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미디어를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 미디어가 되었다.


미디어 리터러시한 수도권의 2040 세대는 오늘날 소셜 미디어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이 바로 표준 시민의 중핵을 이루는 집단이기도 하다. 표준 시민은 촛불 시위를 주도한 수도권 교양 시민 계급이다. 반드시, 수도권에 거주야해야, 표준 시민이라는 것은 아니다. 주된 거주 지역이 수도권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계급적으로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 계급보다는 중간 계급에 훨씬 가까운 집단에 속한다. 몰락한 중산층이거나, 실제로 소득이 중산층에 못미치더라도 마음만은 중산층인 사람들, 다시 말해, 중간 계급 의식을 가진 이들도 다수 포함된다. 이들의 의제는 그래서 좌파적이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적이다. 때로 계급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결정적 국면에서 냉담한 모습을 보이며, 대오를 이탈하기도 한다. "


박권일씨가 말한 미디어 리터러시한 2040 세대와 조 교수의 신좌파는 100%야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 겹치는 계층으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이들 계층을 바라보는 앵글이 다를 뿐이다. 한쪽은 긍정, 다른 한쪽은 비판적인 뉘앙스가 풍긴다. 


조 교수 말대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탈물질적인 성향의 국민들이 늘어날 필요가 있다면 구좌파와 신좌파가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기 보다는 연대를 하는 것이 맞다. 둘의 연대를 통해 탈물질적인 성향의 국민들이 살아가는 토대인, 복지국가의 길은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신좌파가 복지국가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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