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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스럽지만 덜 유난스럽게 책을 다루기까지

1일 1커밋 #107

by 김디트

아무리 무신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가지 정도는 애착하는 물건이 있 것이다. 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 마치 자칫 잘못하면 깨뜨리기라도 할 듯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 말이다. 이를테면 내 친구는 대학교 때 자신의 노트북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후배에게, 친구가 평소 무척 아끼던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울그락불그락 표정으로 '기계를 물로 닦으면 어떡하냐'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더랬다. 마치 자신의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이라도 입힌 듯한 반응이었다. 후배는 주춤 물러나며 친구에게 연신 사과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애인의 친구분은 누군가에게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빌려 줬다가 돌려받은 후 매우 짜증스러워했다고 했다. 무심한 사용의 흔적들에 분개했던 것이다. 결국 친구분은 도저히 그 흔적들을 참을 수 없어 같은 책을 한 권 더 구매하고 말았다고 했다. 남이 보기엔 좀 유난스러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정성을 다해 다루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 사실 나의 경우에도 책이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상황은 굉장히 비슷했지만 친구의 경우에는 뭘 그리 유난스럽게 굴까 싶었던 반면, 애인의 친구분의 경우에는 듣는 나까지 화가 뻗쳐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던 것이다.


책을 손상시키는 그 어떤 행동에도 분노를 참을 수 없었지만 그중 가장 자주 그 분노의 한계선에 다다르게 되는 행동은 바로 책을 꽉꽉 접어 펼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책을 쫙쫙 펼치고 꽉꽉 눌렀다. 아마 정상적으로 책을 보려면 이 폭력적인 행동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난 늘 채 그러기 전에 서둘러 '책을 접거나 확 펼치지 말아 달라'라고 당부해야 했다. 물론 그 말에 '그래' 하면서도 '거 참 유난스럽구나'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대개 나와 같은 부류였다. 애서가,라고나 할까. 애인도 책에 그다지 유난 떨지 않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단 한번 그리 유난을 떨었더니 내 책에 대해서는 조심 소중하게 페이지를 펼쳐 주었다.


지금은 유독 책 펼치는 방법에 대해서만 유난을 떨 뿐이지만, 사실 예전에는 좀 더 유난스러웠다. 얼마나 유난스러웠냐면 내 책은 늘 새 책과 같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페이지가 조금 접히기만 해도 내 팔이 바깥쪽으로 꺾인 것만 같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책에 줄이라도 긋는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책에 가해지는 그 어떤 변형도 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매우 섬세하고 애지중지한 동작으로 책을 읽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책에는 대충 이런 의미의 글이 적혀 있었다.


"책에 이렇게 공간이 많은 이유는 줄을 긋고 메모를 하라는 의미이다"


그 글을 읽고 나서 당장 손에 있는 책을 훑어보니, 정말이었다. 심지어 글보다도 공백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나는 머리를 망치로 깡 맞은 것처럼 멍하니 몇 번이나 그 글을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놔둬봤자 아무런 가치도 남기지 못한다는 글이 이어졌다. 이 또한 옳은 말이었다. 나는 당장 책을 엎어놓고 필기구를 찾아 나섰다. 당장 책을 더럽혀 버려야지 직성이, 한이, 내가 쌓아온 이 미묘한 집착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곧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펜을 하나 집어 들고 책 앞에 섰다. 꿀꺽. 침을 삼키며 경건한 자세로 책을 집어 올렸다. 펜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조심스럽게 방금 그 문구 위로 펜 끝을 가져갔다. 그리고, 끝이었다. 나는 파, 하고 한숨을 내쉬며 펜을 집어던졌다. 도저히 선을 그을 수 없었다. 내가 만든 한계선은 나 자신조차 감히 넘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결국 늘 그래 왔듯이 책을 계속 아끼고 사랑하기로, 신줏단지로 모시기로 했느냐. 물론 마냥 물러날 수 없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널브러져 있는 펜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퍼뜩 떠오른 새로운 아이디어에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필기구를 모아둔 통을 와르르 쏟아내서 뒤적거렸다. 없을 리가 없었다. 나는 금세 찾던 걸 찾아내어 책 앞에 앉았다. 그리고 문장 위로 그 필기구를 가져갔다. 이번에는 손이 그다지 떨리지 않았다. 무사히 문장 시작부에 안착해서 주우욱, 거침없이 줄을 그었다. 난 그렇게 내 심리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 필기구가 뭐였느냐면, 연필이었다. 평소엔 그리 무시하고 하등 쓸데없다며 필기구 더미 속에 던져 놓았던 연필. 하지만 연필은 펜에 비해 월등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지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지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언제나 원하면 새 책으로, 아니 그와 비슷하게는 만들 수 있다는 안정감은 나의 심리적 허들을 순식간에 차도와 인도 사이에 있는 높이 정도로 낮춰줬다. 난 그렇게 독서, 하면 연필을 찾아 뒤적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우개로 내 그 수많은 독서의 흔적들을 단 한 번도 지워보려 시도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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