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유독 어른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이를테면 학교 중앙 계단은 선생님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거나. 사실 그 규율의 효용가치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학생들은 1층 로비에 있는 정수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늘 불필요하게 긴 동선을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로비 뒷문으로 이어지는 자판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도 동일한 불합리함을 겪어야 했다. 분명히 교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무의미한 규칙이었다. 하지만 우리 학교도 그렇고 다른 학교도 그렇고 다들 무언의 합의에 의해 그 규칙을 지키고 따랐다. 선생님들이 '중앙 계단을 사용하지 말라'며 다그치는 걸 자연스럽게 '정상'으로 받아들였다. 군부 독재가, 통금이, 수많은 불합리가 수많은 희생으로 결국 무너져 내린 후의 세계였지만, 어린이에게로 향하는 세계는 여전히 꽉 닫혀 있었다. 그 때문에 혹여나 주번이라도 맡아서 아무도 없는 학교를 쓸쓸히 걸어 나갈 때도 가까운 중앙 계단을 두고 좌우측 계단을 사용했다. 늦은 시간이라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합의와 규율의 무게를 이겨내고 중앙 통로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엔 어린 나의 정신은 무척 미성숙하고 힘이 없었다.
산다는 것은 곧 규칙을 지키는 것이었다. 살면서 정말 많은 규칙들을 마주했고 지키고 때로는 어겨왔다. 종종 '중앙 계단'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규칙도 마주했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선과 같은 규칙들도 마주했으며, 이건 지키지 않으면 정말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하는, 내가 나를 옭메는 규칙들도 자율적으로 마주했다. 그렇게 많은 규칙들을 마주하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은 지점이 생기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종종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게 바로 '규칙을 곧이곧대로 지키면 손해 본다'는 의미였다. 나는 '너 정말 착하구나' 하는 타인의 말이 쌓일 때마다 그들의 입꼬리가 한쪽만 말려 올라가는 걸 연거푸 지켜봤다. '착하게'가 '순종적으로'로 쉽게 치환되는 세상에서 착한 삶은 쉽게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규칙에 순종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좀 더 융통성 있게' 살아가는 식으로 나의 삶은 차츰차츰 변해갔다. 비록 '규칙'이더라도 누군가가 손해를 보지 않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고 '규칙을 어길 수' 있게 되었다. 아마 학교 중앙 통로를 걸으라 하면 땀을 삐질 삐질 흘리던 그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경악하지 않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저런 철면피의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회사 지하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평일은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규칙을 지켜야 하는 나는 회사에 나오는 날이라면 저녁을 먹고 습관처럼 회사 지하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기승이었다. 어느 날부터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용 자제'라고 적힌 간판이 걸렸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발걸음을 주춤하며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 선이라면 나는 규칙을 어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야 했다. 게다가 '사용 자제'는 '사용 금지'와는 다른 말이니까. 실제로 샤워장은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면 한 명씩만 사용해 주세요' 하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나는 어느 날부터 마음을 굳히고 철면피를 깐 채 스스럼없이 회사 지하로 발걸음을 향했다. 게다가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가끔 지하 운동 기구들에 사용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나는 더더욱 거리낄 것 없이 굴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늘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운동을 하러 지하로 내려갔다. 그런데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살피니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만났구나. 지하의 룰을 깨고 잠입하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난 잠시 고민했다. 들어갈까 말까. 규칙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한 깨기로 한 터였다. 이 규칙 파괴는 과연 선점한 이를 불편하게 만들 것인가. 찬찬히 고민하다가 그냥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난 내심 반가웠다. 규칙을 깨면서까지 운동을 하려는 사람. 분명 나처럼 운동 상대를 반가워해 줄 것 같았다. 함께 같은 공간을 조용히 공유하며 작은 유대를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지하로 들어섰다. 하지만 나의 그 내밀한 기대감은 꽉 닫힌 GX룸 플라스틱 셔터형 차단막에 쾅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 누군가는 차단막을 친 채 운동하고 있었다. 음. 무척 내향적인 사람인가 보구나. 난 조금 실망하며 그 차단막 밖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운동을 할수록 의아해졌다. 내가 운동을 시작한 지 50분이 지나가는데 차단막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운동을 오래 하는 스타일이신가? 그게 아니면 너무너무 정말 심히 내성적인 분이시라 타인을 대면하는 걸 참지 못하는 분이신가?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차단막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덧 8분이 더 흘러갔다. 나도 슬슬 마무리 운동으로 운동을 닫는 중이었다. 그 때, 그 누군가는 결국의 결국 그 작은 공간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차단막을 열어젖혔다. 통화를 하면서 급히 지하를 나섰다. 통화가 급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던가 혹은 통화를 핑계로 나갈 생각이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에 나는 심장이 쿵 하는 기분이었다.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하며 속으로 어이구, 멍청이, 멍청이. 나를 자책했다. 그에겐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부끄럼 많은 이는 바로 여성이었다. 운동복을 입은 여성이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난 여성이라곤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 상상력은 이토록 빈곤했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규칙을 깸으로써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