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에서 검댕이 묻어났지만

1일 1커밋 #9

by 김디트

누군가가 내 이름 한자를 묻는다면 나타날 현(現)에 비 우(雨)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보통은 비 우자를 이름에도 쓰나요? 하고 되묻곤 한다. 나는 이름에 들어가도 좋다고 허가가 내려진 한자들을 걸러낼 수 있을 만큼 한자에 대한 소양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하하, 미묘한 웃음을 짓고 만다. 그리고 잠시 정적. 나는 이 정적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또, 은밀하게,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 상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거 알아요?"


상대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저, 서류 상으로는 한자가 달라요. 볼 견(見) 자 있죠, 그걸 쓰고 현이라고 읽어요"


그러면 상대방은 두 가지 반응으로, 한쪽은 아 그러신가요. 신기하네요, 하고 다소 무심하게 넘어가고, 다른 한쪽은 어떻게 그렇죠? 왜요? 하고 물어온다. 아마 내가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면 첫 번째 반응은 분명 실망스러운 것이었을 테지만, 실은 단지 무거운 정적이 싫어서 TMI 정보를 방출한 평범하게 소심한 사람일 뿐인 나는, 첫 번째의 무심한 반응을 선호한다. 정적에 대비해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앞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한자가 지난하므로, 두 번째 반응에 대한 응답으로는 또다시 난처하게 하하, 웃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면, 나의 무식을 덜 드러낼 수 있는 첫 번째 반응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신생아를 생전 처음 맞이한 그때의 할아버지는 울음 터뜨리기도 어려웠던 어린 나처럼 미숙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나는 누군가가 등을 두드려준 덕에 금세 첫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을 테지만, 그 당시의 할아버지에게는 누군가의 그런 손길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고심을 거쳐 지었을 내 이름은 서류 상에서만은 現에서 見이 되었고, 생일은 7월 25일에서, 11월 12일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름뿐 아니라 출생 신고마저 틀린 거다. 하지만 그 덕에 나는 만 나이나마 조금 늦게 늙어가는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고,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상대와 일여분이나마 어색한 침묵을 줄일 수도 있게 되었다. 한 가지 더, 장점이라면, 카카오톡 생일 알림 기능 덕으로 11월에 예상치도 못한 깜짝 선물을 받기도 한다는 것.


시절을 대표하는 유행으로는 뭘 꼽아야 할까. 패션? 문화? 토너먼트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내가 한창 클 무렵에는 비디오테이프, 특히 VHS가 크게 유행 중이었고, 그 때문에 비디오 대여점이 성행했다. 덕분에 난 아직까지 눈만 감아도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로 일축할 수 있는 경고 영상을 블루레이보다 더 고화질로 볼 수 있다. 조금 과장 및 생략을 거친 더 다이내믹한 영상으로 재생되긴 하지만.


아무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유행으로 꼽을 것으론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유행 같은 건 한때의 소치일 뿐이라는 생각을 신념처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식의 이름은 당대 가장 무난한 중 가장 예쁜 이름으로 붙여주고야 말 것이다. 갑돌이, 갑순이 같은 이름의 아이가 나중에 학교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아무렴, 본인의 신념으로 자식의 인생을 망치려 들면 안 된다. 그런데 왜 정치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그들은 그 당연한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먹고 말까. 그건 의문이다.


사실 이렇게 이름에 대한 길고 긴 소회를 털어놓는 이유는, 내 닉네임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변명해 보기 위함이다.


김 디트. 드래곤 라자로 유명한 이영도 님은 새 시리즈에서 도깨비가 인간을 이르는 말로 '킴'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는데, 나도 마침 그와 같은 성이라서, 사실은 그런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습니다, 핑계 대기도 좋고, 이런저런 이유로 어쩌다 보니 내 성을 앞에 달게 되었다. 그렇지만 본래의 닉네임은 디라이트(Delight)로,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또 과거의 유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닉네임을 지을 때만 해도 판타지가 유행이었다. 굳이 강조하자면 대 유행이었다. 압도적인 수량으로 D&D 풍의 판타지 소설이 뽑혀 나왔었는데, '양판소'라는 단어를 생산해 낼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닉네임도 그런 시류를 타고 지어진 닉네임이다. 앞서 말했듯 이름은 유행을 많이 타고, 그래서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가만히 내 닉네임을 바라보고 있자면 아마 인터넷 역사 상의 '갑돌이' 같은 위치가 아닐까 싶어 진다. 김 갑돌, 뭐, 그래도 구수하고 좋지 않나.


그래서, 왜 아직까지 이런 '구수한' 닉네임을 고수하고 있느냐. 아마 할아버지가 후에라도 내 이름을 見에서 現으로 바꾸지 못한 이유와 같을 것이다. 초점이 흔들려 피사체가 일그러진 옛날 사진을 도저히 지우지 못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이유로 가입 신청서의 별명 란에 '디트'라고, 검댕이 잔뜩 묻어나는 이름을 적는다.


21. 12. 2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돈은 아무튼 편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