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플레이 리스트

1일 1커밋 #133

by 김디트

아무래도 나는 시간에 대한 어떤 집착증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비는 시간이 생기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증상 같은 것 설명이 되지 않았다. 공허함만 부풀어 오르는 스낵 컬처일 뿐일지라도 어찌 됐건 남는 시간 안에 쑤셔 넣어야 안심되었다.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면 남아도는 시간 정도는 순식간에 쓱싹 처리해버릴 수 있는 세상에서는 시간에 대한 강박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 원인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시간이 남아도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를 참을 수 없게 된 것은 확실했다.


출근을 하던가, 약속 장소로 향하던가, 이동할 때가 강박의 가장 대표적인 타깃이었다. 사실상 목적지로의 이동을 충실히 챙기는 중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나는 다리를 달달 떨다가 기어코 핸드폰을 끄집어내 구글 크롬의 색색깔 둥근 그 아이콘을 눌러버리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참을성이라는 걸 (아마도) 가지고 있는 지성인이었으므로 늘상 그런 식으로 침잠되었던 건 아니다. 이따금 가방에서 책을 끄집어내거나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거나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성인의 인내심도 결국 결단코 막지 못하고 틈을 보이는 콘텐츠가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었다.


다른 인스턴트 식 스낵 컬처들이 가져다주는 죄책감이 없어서일까. 비어있는 시간을 마주할 때면 거리낌 없이 귓구멍을 이어폰으로 구겨 막았다. 현실과 단절되는 그 기분이 좋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그 감정적인 느낌들이 좋다, 하고 입 발린 말로 치장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런 것들관 별 연관성이 없었다. 단지, 습관성이었다. 어떤 소리라도 있으면 그게 아무리 소음일지라도 조금 덜 외로운 것처럼. 그러니까, 이른바 화이트 노이즈 같은 것처럼. 그 소리들은 익숙한 소리일수록 좋았다.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그 옛날 곡들이 주로 플레이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고, 그들을 동어 반복적으로 고막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집 밖을 나설 때 반드시 챙겨야 하는 몇 가지를 개수로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나서기 직전 개수를 상기하며 안 챙긴 것은 없는지 한번 확인하는 것이다. 회사에 갈 때는 다섯 가지, 그렇지 않을 때는 네 가지. 지갑, 휴대폰, 이어폰, 마스크. 순서 상관없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가며 일, 이, 삼, 사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오늘은 출근이었으니까 회사 출입증을 더한 다섯. 거기엔 반드시 이어폰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끔 헷갈려 4까지만 헤아리고 회사 출입증을 안 가져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출근길 버스에 자리를 잡고 또다시 귀를 꽉 틀어막았다. 익숙한 노래를 틀고 책을 펼쳤다.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든 그걸로 집중력이 크게 손상되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화이트 노이즈와 완벽히 동일한 기능을 했다. 되려 집중력이 올라간 셈이다.


애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집중해서 뭔가를 하는 데 노래를 트는 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아마 애인은 노래의 가사에, 음에, 그 모든 세세한 항목들에 섬세하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 습관이 철저히 학습되어 있는 사람이라서. 하지만 나는 문화적 배움이 턱없이 부족했다. 마치 젓가락을 X자로 꼼질거리는 사람과 같았다. 음악을 집중해서 듣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처절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잠깐 집중이 흐릿해지기라도 하면 가사를 놓쳐서 허겁지겁 가사집을 찾아들어야 했다.


그렇다 보니 내 플레이 리스트는 어떤 주제, 장르 같은 게 통합적이지 않고 산만했다. 귀에 익숙한 것들만 아무렇게나 때려 넣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화이트 노이즈에 감정을 움직이는 조미료를 조금 섞은 게 내 플레이 리스트였다. 듣고 또 듣고 들어왔던 노래들이 역사처럼 내 핸드폰 속에 쌓여 있었다. 그 노래들의 세부적이 요소들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되려 그 노래와 연관되어 있는 나의 과거 상황들이 훨씬 나의 감정을 건드렸다. 아, 이 노래는 언제 들었었지. 이 노래는 누군가와 함께 들었었지. 그랬었지. 그러면서 말이다. 그런 소회를 포함한 화이트 노이즈.


그렇지만 역시 과거에 매몰된 채로, 모르는 채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화이트 노이즈만 듣기에는 삶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차츰차츰 새로운 노래들을 '들었고' 그만큼 몇 발자국 나아가기 위해 용썼다. 아쉽게도 그 용씀이 겉으로 크게 티가 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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