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변했고 시간은 빨랐다.
1일 1커밋 #141
네가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사실 좀 난처하다. '좋아하는 게'에 얼마나 방점이 찍혀있느냐가 관건이다. 가볍게 찍힌 질문에는 한없이 가볍게 대답해주면 된다. 가령 '그런 질문을 해주는 섬세한 너.' 정도면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배구로 치자면 가뿐하게 토스로 받아내는 격. 하지만 다짜고짜 강스파이크가 날아오면, 그때가 바로 난처해지는 타이밍이다. 꽤 정색하고 있는 상대에게 아까 전과 같은 가벼운 어투는 아마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 분위기에 밀려서 찬찬히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자, 과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장 생각나는 것은 코딩? 독서? 게임? 같은 대분류들이다. 그렇게 대답하면 상대는 가당찮다는 듯 좀 더 집중해보라는 투로 되묻는다. '오, 그렇군요. 책은 어떤 걸? 게임은 어떤 것을?' 마치 취조라도 당하는 심정이다. 최고 좋다 하는 것들을 미리 골라 평소에 리스팅 해두지 않은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워진다.
살면 살수록 좋아하는 것은 늘어만 가야 할 것 같은데. 나이를 이 정도 먹었으면 이제 좋아하는 것쯤은 가뿐히 손가락 모두를 동원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야 할 텐데.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새롭게 배우고 새롭게 잊어먹는 것들이 있듯이 취향도 끊임없이 그렇게 순환한다. 무서운 점은 잊어먹는 분야가 더 활약하면 취향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그러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좀 읽히지 않아도 책을 손에 쥐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취향 중엔 잊어버린 취향, 하지만 기억으로는 강렬하게 남아있는 취향들도 있다. 이제는 잘 즐기지 않지만 즐겼던 기억이 있는 취향들이다. 요 최근엔 갑자기 요시모토 바나나님의 키친이 다시 읽고 싶었다. 그 책은 과거, 두세 번은 너끈히 구매해서 책등이 닳아 너덜거릴 때까지 읽었던 책이었다. 몽환적이면서 로맨틱하고, 잔잔한 방식으로 소수성까지 챙긴 책이었는데, 한때는 나도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곤 했었다. 그렇게 막상 떠오르니 참을 수 없었다. 은근히 피어오르는 향수의 단내에 취해서 리디북스에서 키친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결국 하트만 남기고 페이지를 나서야 했는데, 아무래도 역시 과거의 취향을 현재로 소환하는 게 반드시 즐거운 경험일 거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인이라도 하면 생각해보기로 할까, 하고 취향이 또 바뀌어 있을 미래의 나에게 과거의 취향을 전가했다.
게임 쪽도 복고가 유행이다. 옛날 명작 게임들이 수없이 리메이크, 적어도 리마스터되어서 최신 게임기 속을 활발히 헤집었다. 이젠 게이머들도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계층이 생겨났다는 걸 게임업계도 인지해버린 탓이다. 하지만 명작 게임이 다시 나온다고 해서 또다시 명작이 된다는 법은 없었다. 명작이란 그 자체로 명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상과 사람들의 인식, 유행 같은 게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얼마 전, SNK에서 테리 보가드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다른 여 캐릭터의 엉덩이를 쓸어만지고 지나가는 트레일러 영상이 문제가 되었다. 몇몇 게이머들은 '그 캐릭터는 원래 그런 캐릭터야'라고 했지만, 그건 참 무서운 생각이었다. 원래 그렇다, 사람을 핀으로 꽂아 시간선에 고정시킬 수 없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취향이 끊임없이 늘어가지만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 범람하는 리메이크 작들은, 과거를, 향수를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얼마 전에는 랑그릿사 리메이크작을 해보려다가 스위치가 고장이 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머금고 AS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스위치가 돌아왔다. 망작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게임이었지만, 역시 도져버린 내 향수병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두근거리면서 플레이 온. 두근거린 게 게임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아마 후자겠지.
한참 게임을 플레이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6 스테이지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옛날의 나는 아무리 집중해도 하루에 2, 3 스테이지 정도까지 진행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원래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돌파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게임이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시간은 10킬로미터였고, 지금의 시간은 30킬로미터이니까 말이다. 늙는다는 건 시간적으로도 너무나 서글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