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금요일부터 회사에서 만들던 우리 게임이 클로즈 베타 테스트(CBT)를 시작했다. 북미 쪽에서는 콘솔로 이미 진즉 운영을 하고 있던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이로써 우리나라 유저들에게 우리 게임이 정식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일까 이제야 새삼 오픈 직전이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금요일 이전까진 이 게임이 실질적으로 오픈을 했고, 이미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실감이 전혀 없었다. 출시를 하자마자 PC로 컨버팅 하는 작업에 바로 돌입했기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으로, 금요일 PC 버전 CBT를 진행한다고 회사가 떠들썩하게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루 종일 업무 차원에서 CBT 게임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여전히 출시를 하는구나 하는 소회 같은 걸 느낄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클로즈 베타 오픈도 오픈이라 이건지, 역시나 이번에도 피드백이든 크래시든 문제가 쏟아졌다. 아무리 촘촘히 거른다고 걸렀지만 그 거름망보다 작은 버그들은 치밀하고 철저히 그 밀림 같은 코드들 속에 몸을 숨기고 게릴라전을 펼쳤다. 누가 그랬던가. 버그가 없는 프로그램은 있을 수 없다고. 아무리 꼼꼼하게 살펴가며 만든 코드일지라도 그 몸집을 불려감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버그의 수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임백준 님의 '뉴욕의 프로그래머'라는 책에는 간단한 이진 검색 알고리즘도 버그 없이 만들기가 쉽지 않음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프로그래밍 펄' 저자로 유명한 존 벤틀리 교수는 카네기멜론의 컴퓨터공학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이진 검색 알고리즘을 만들어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모두 버그 투성이었다는 것. 심지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벤틀리 교수가 작성한 슈도 코드에서도 버그가 숨어있었다는 결말까지, 결국 인간의 인지력으로는 버그 완전 소탕이 불가능한 영역에 가깝다는 이야기. 솔직히 말해 이런 글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기운이 빠진다. 그리고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게 있구나 하고 내가 만드는 버그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더 꼼꼼하라는 교훈에서 더 느슨해지는 정신력을 얻어가다니 참 나도 나약한 인간이다.
업무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나약한 정신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예컨대 쏟아지는 버그를 수정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번뇌에 물든다. 쉽게 재현되고 수정되는 버그는 쉬운대로,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애초에 버그를 나오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왠지 이 버그를 나에게 할당했을 팀장님을 보기가 민망해진다. 반대로 쉽게 재현이 되지 않고 찾기도 힘든 버그는 어려운 대로, 이 버그는 정말 실존하긴 하는 걸까, 혹시 착각해서 나에게 보낸 건 아닐까, 부정적인 쪽으로 의심을 키워나가다가 에라 모르겠다, 버그를 살짝 밀어 두고 다른 쉽고 편한 일감으로 달려가기가 일쑤이다.
금요일도 그렇게 어김없이 나약한 날이었다. 멍하니 우리가 만든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그 뒤편으로 쏟아지는 버그들은 많았다. 컨트롤러니 마우스니 조작하면서 멍하니 퀘스트를 달성하면서 버그 쪽으로는 일체 시선을 두지 않았다. 매크로라도 돌려서 그 버그들을 '전체 선택' 해서 휴지통에 넣고 '전체 비움' 처리를 해버리고 싶었달까.
아마 나만 이런 무기력함에 유달리 취약한 건 아닐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군을 상대로는 전의를 상실하게 마련이다. 삼국지 같은 전략 게임을 하다 보면 병사들의 전의라는 수치가 전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그런 걸 보면 아마도 보편적인 감정이겠지 싶어 진다. 하지만 우리 팀장님은 달랐다. 그러니까, 마치 300척 이상의 수군을 맞이한 이순신 장군님이 그랬던 것처럼 팀장님은 전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감정을 칼처럼 벼리면서 곧 다가올 전투를 대비한다. 그리고 버그 하나하나를 손수 베어낸다.
CBT는 단발적이지 않고 밤낮 거리낄 것 없이 3,4일 연속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 팀도 대기 인원을 2명 정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빠르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팀장님은 그 대기 인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컴퓨터를 켰고, 발생하는 문제들을 트래킹 해나갔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버그들의 몸통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꽂았다.
긴장감 넘치는 첫날밤이 흘렀고, 토요일 오전이 되었다. 팀장님은 담담하게 팀 슬랙에 전투의 현황과 적들의 수급을 전시했다. 자랑 섞인 투가 아니라 정말 무미건조하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각각에게 어떻게 분배하겠습니다. 전의를 상실하고 다른 시체들 틈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나는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영웅적인 서사를 마주할 때면 현실감이 없기 때문인지, 나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때문인지 이 정도라면 왠지 나도 간단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를테면 이진 검색 알고리즘 따위는 한 방에 구현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아니, 자만감. 카네기멜론 박사과정 학생들이 의례히 지니고 있었을 그 자만감이 이상할 정도로 샘솟았다. 그게 자만감이라는 것만, 그러니까 한 방에 해결될 리 없다는 것만, 또한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실수를 할 거라는 것만 잘 인지하면 언젠가는 저 팀장님처럼 무한한 인내력과 끈질김과 끊임없는 자아비판을 감내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끈질김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쉽사리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더 나아지기 위해선 포기해야겠지.
21. 0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