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풀리듯이 규제도 조금 느슨해졌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마스크를 끼고 밖을 배회하고 있었다. 사실 '5인 이상 집합 금지'는 풀리지 않은 터라 '삼삼'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의 회포를 단단히 풀어버리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었는지 사람들은 밖, 특히 카페를 점거하고 나섰다.
일요일이었다. 나는 애인과 재개봉한 '화양연화'를 보기로 한 참이었다. 10분 전, 애인이 야심 차게 출력한 플라스틱 포토티켓을 당당히 보이고 상영관에 입장했는데, 합정 메세나폴리스 가득 사람들이 왁자한 것에 비해 관객은 없었다. 우리가 첫 번째 입장 팀이었기 때문에 살짝 놀랐다. 대관이라도 한 기분이랄까. 이대로 우리 둘이서만 보게 되는 건 아닌가 조금 기대가 되던 찰나에 다음 팀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기분이란 것도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좌석을 가득 메우거나 한 드라마틱한 전개는 없었다. 관객 무리는 각 열을 통째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총 6열이 채 되지 않는 듯했고, 그래서 난 즉석구이 오징어를 사기 직전에야 영화 보면서는 못 먹는다는 사실을 안내받아 받은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을 받으며 영화의 시작을 지켜봐야 했다.
애인은 영화를 보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왕가위 감독만의 느낌이 있지 않아? 같은 로맨스를 보더라도 이 느낌이 안 나는 것 같아."
애인이 말하는 그 느낌이라는 게 영화 상영 내내 6줄 남짓의 사람들을 통과했다. 한 칸 너머에 있는 애인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쭉 뻗었다. 애인은 내 손바닥을 화양연화의 테마곡 박자에 맞춰 둥둥둥 두드려댔다. 첸 부인과 차우가 국숫집 앞에서 느릿느릿하게 서로를 지나갈 때, 나의 손바닥은 둥둥둥, 둥둥둥. 오감을 만족하는 영화란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대사가 적은 대신 장면 장면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시선, 몸짓, 그들을 감싸고 있는 배경 같은 것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건넸다. 몇 가지는 알아들었고, 몇 가지는 애매했으며, 아마 수많은 것들을 놓쳤을 것이다. 알고 있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작품을 감상할 때 나는 늘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나의 무지를 가장 쉽고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이 아마 예술 작품의 앞일 것이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에서 북적거리는 관광객들에 섞여서 유명세 말고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랐고, 그래서 영화 앞에서 조금 부끄러웠다.
'지나간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영화는 이 문구와 함께 끝이 났다. 이 날 저녁 애인은 식당에서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다 '화양연화'처럼 날 찍어주겠다며 거울을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는데 다행히도 식당에 거울이 없었다. 식당에 거울이 있었다면, 그리고 애인이 거울 너머의 나를 촬영했다면 왠지 굉장히 슬퍼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난 조금 안도했다. 그렇지만 애인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왠지 모르게 그 장면은 이 문구와 엮여서 아직까지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다. 장면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란 건 그렇게 일상에도 알게 모르게 숨어있는 것이었다.
스탭 롤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나가라고 채근이라도 하듯이 흰색 조명이 켜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참을 앉아서 붉은 스크린을 끝까지 바라보던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후자였다. 앙코르와트의 구멍 같은 게 가슴에 뻥 뚫린 우리는 비밀이라도 채워 넣고 막아야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화관을 나온 우리는 가만히 메세나폴리스를 걸었다. 애인은 영화 때문인지 몸상태 때문인지 조금 지쳐 보였고, 그래서 투썸 플레이스라도 가서 조금 앉자고 의견 합일을 보았다. 하지만 달달한 디저트라도 입에 넣어서 분위기를 쇄신시켜보려 했던 목적은 결국 달성할 수가 없었는데, 그 널널해 보이던 카페는 사실 거리 유지를 목적으로 절반의 테이블을 비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서성거려 보았지만 자리는 없었고, 곧 애인은 카페를 나가자고 나의 팔을 끌었다.
애인의 손에 끌려 나가면서 아쉬운 마음에 카페를 돌아보았다. 책을 읽는 사람, 공부를 하는 사람, 수다를 떠는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마스크로 얼굴을 곱게 감싼 채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카페를 한 칸 한 칸 띄워 앉은 사람들. 그리고 거기에 섞이지 못하고 나가는 우리. 카페인을 충전하기 위해 다음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유리창 안, 카페를 스치듯 바라보자니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우리는 주인공일까 미장센의 한 요소일까. 만약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제목은 뭘로 지어야 할까.
애인은 곧 나의 손을 화양연화 ost에 맞춰 둥둥둥, 둥둥둥 두드렸고, 나는 마스크 속에서나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제목은 그걸로 해야지, 내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21. 0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