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옛날 MMORPG의 기억, 이랄까 분위기가 그리웠다.
슬금 대학교 친구들 채팅방에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그때의 추억이라도 복기할 겸 온라인 세계로 복귀해보지 않을래, 살며시 권유해 보았다. 당연하지만 친구들은 제각기의 이유로 그 불편함을 거절했다. 사실 나도 진심으로 진심은 아니었다. 그냥 'MMORPG' 자체가 아니라 그 룰 아래서 만났던 인연들이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의 인맥은 지금처럼 단단히 고착화되어 있지 않았다. 되려 상당히 넓게 열려 있었다. 참 다양하고 많은 취향과 그에 엮인 인연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코 앞에서 열차를 놓치고 헥헥거리는 눈으로 지나간 것들을 바라본다. 만약 내가 인맥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면 그 취향과 인연들이 끊어지지 않고 아직 남아있을까. 아직까지 이따금 잘 지내냐고 연락하고 있을까.
그렇게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나면 발이 넓은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해보는 데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조곤 조곤 가능성을 점쳐보게 된다. 모든 시간이 관계의 연속으로 이어져 있는 삶. 아마 그 많은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려면 쉴 새 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 간의 관계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퇴근 후에 집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는 시간 같은 거 없이 그 시간들을 쪼개고 쪼개서 커피를 마시고 술자리를 가지고 떠들썩한 밤을 보낸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게 정말 가능한 삶인가. 어제도 오늘도 심지어 내일도 정적인 하루를 보낼 나로서는 거기까지 상상하고서 몸서리를 치고 만다. 역시 나는 절대 감당할 수 없겠구나, 결론을 내리면서 옛날 그 인연들의 상실은 필연적이었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기본 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기본적 행위에도 개개인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내가 타인을 생각하는 관계와 타인이 나를 생각하는 관계의 온도차는 늘 있을 텐데, 나는 늘 나를 기준으로 '너와 난 이 정도 사이 아니었어?'의 뉘앙스를 꺼내 든다. 대부분은 '그래, 그 정도는 되는 것 같네' 하지만, 가끔은 '너 왜 이래?' 할 때도 있어서 이따금 크게 당황한다. 아마 몇몇 관계는 '너 왜 이래?' 하고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에 손이 급할 때 특히 인맥이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아는 인맥이 있었다면 부탁이라도 조금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싶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그 '아는 인맥'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과연 그 부탁을 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나도 이따금 그런 부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자원을 소비하면서 기꺼이 맡아줄 그런 포용력과 인내력이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내 경험에 비춰보면 정말 인맥이 넓다고 하더라도 아마 정말 간단한 조언이나 정보 같은 것 이상의 도움은 받기 힘들지 않을까. 그냥 나의 '인맥 무용론' 기준으로만 풀이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인맥 무용론자의 인맥 안에서는 충분히 가깝지 않았던 사람들은 물질적인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연락이 쉽게 끊겨버리고 만다. 이제 남아있는 인맥들은 나의 그 어떤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뿐이다. 남아있는 사람의 수가 그리 많진 않은 걸 보면 나의 조건이라는 것도 제법 까다로운 모양이다. 생각보단 내가 까탈스러운 사람이었구나 싶어진다. 그렇다고 그 어떤 조건을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즉 '당신과 가까워지려면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겁니까' 묻는다면 나는 '명확하지 않습니다.'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음울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은 인맥 중 한 그룹이 바로 오늘의 그 대학교 친구들 무리. 고등학교 때까지의 친구들이 진짜 친구고, 대학교 가서 쌓는 인맥은 소용없다는 말이 있었는데 거기에 우리는 예외였던 모양이다. 우리의 아웃사이더적 특성이 발휘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되려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과는 연이 많이 끊겨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연락하면 많이 연락한 것으로 전락했고, 이 대학교 친구들은 하루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뭔가 어색함을 감출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학교 친구들의 단톡 방은 지금도 와글와글 시끄럽기 짝이 없어서 수차례 나의 주의집중을 앗아간다.
이들은 나의 그 조건을 어떻게 달성했을까. 왜 친해졌는지, 심지어 언제 친해졌는지조차 애매모호하다. 아마도 군대를 전후로 했던 것 같긴 한데. 아마 같은 동아리, 같은 기수, 같은 나이 등등 '같은' 동질감이 많이 작용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동아리가 같으니 관심사도 같았고, 공유할 수 있는 컨텐츠도 많았다. 지금도 그렇느냐 하면 그렇진 않은데, 그 당시에는 그랬다. 아마 지금 만났다면 이토록 친밀하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관계가 시작되기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타이밍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왜 이렇게까지 나의 인맥 풀에 대한 고찰이 이어졌냐면 문득 이상해서. 나의 인맥은 좁고 좁은데, 아마도 어떻게 보면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그 좁은 관문을 통과한 이들, 대학교 친구들은 대체 어떤 점이 맞아떨어져서 이렇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수다를 떨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일까. 뭐 그런 점들이 이상해서. 그리고 아직 그 인맥의 기준이 충분히 다져지지 않았을 때 수없이 거쳐갔던 사람들의 면면이 불확실하게 그리워서. 그래서 구구절절해졌다.
21. 0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