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임은 별로 안 당기네
1일 1커밋 #38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어떤 장르에 대한 취향은 소분류에서 대분류로 종종 과대해석 되곤 하는데 게임은 그 분류가 상당히 넓게 포진해서일까 높은 확률로 과대해석의 타겟이 된다. 넌 게임 좋아하니까 이거도 좋아하겠지? 하면서 내 취향과 별로 관계가 없는 걸 무신경하게 내미는 사람들을 이따금 만나게 된다. 분명히 말하건데 내가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게임을 좋아하진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좋아한다. 세상은 넓고 게임은 많은데 굳이 내가 싫어하는 게임을 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싫어한다기 보단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그 숨어있는 재미 요소를 굳이 발굴해 내면서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것에 가깝다.
나의 친구는 나처럼, 아니 나보다도 게임을 좋아하는데 그것 못지않게 게임을 '영업하는' 것도 좋아한다. 영업이란 다른 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 자신이 즐겁게 즐긴 게임을 추천하여 플레이하게 종용하는 걸 뜻하는데, 아마 친구는 영업도 게임이 제공하는 어떤 서브 컨텐츠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 상대방이 그 추천받은 게임을 모두 마친 후 극찬하고 떠받들면 그제야 그 게임의 속속들이 모두를 완전히 즐겼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이를테면 친구가 나에게 언더테일을 영업할 때의 일이다. 친구는 집요하게 이 게임을 권했는데, 그 집요함이 얼마나 집요한지 스팀으로 게임을 선물해 주기까지 했고 그래서 나는 떠밀리듯이 게임을 시작해야 했다. 게임 선물에는 예컨대 블로그 체험단이 물건을 사용해본 후 길고 정성스러운 리뷰를 써야 하는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고 소감을 이야기하는 그런 모종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게임을 설치하고 실행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게임의 첫인상은 굉장히 가냘프고 옛스러웠는데, 고전 게임의 오마주일까. 심드렁한 표정으로 캐릭터를 움직여 나갔다. 몬스터들이 등장했고, 나는 관성에 따라 행동했다. 그 관성이 결국 후회를 불러오게 되지만, 그건 게임을 엔딩 보고 난 후의 이야기. 그래도 나는 빠르게 게임에 흡입되었다. 쉬운 방법과 어려운 방법을 저울질하다가 양심의 가책 때문일지 결국엔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고 수많은 탄막을 가르며 수많은 적들을 지나쳐갔다. RPG와 탄막이라니, 글로 표현하니 좀 애매모호하지만 아마 게임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테지.
엔딩을 보고 난 후의 나에게 심드렁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난 흥분을 감출 수 없어서 친구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그 반전, 그 흥분, 그 스토리에 대해 수없이 떠벌렸다. 친구는 호응하거나 내가 놓친 요소들을 언급하거나 했다. 친구의 글자 하나하나에는 최대한 숨기기 위해 갈무리된 듯한 가벼운 전율과 희열이 담겨 있었다.
그 후로도 친구는 종종 나에게 게임을 소개했다. 그래서 친구는 나의 취향을 제법 잘 알게 되었다. 사실 그 영업 덕에 그 친구는 단톡방에 있는 모든 친구들의 취향들을 꽤 적확하게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 즐기면서 오래 하다 보면 그만큼의 눈썰미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취향에 맞는 게임이라고 해도 영업이 늘 성행하는 건 아니었다. 친구가 재밌다고, 한 번 해보라고 열심히 영업을 해도 미동도 않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그럴 때면 친구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이 친구 덕분에 나는 내 취향을 좀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래서 친구의 영업을 좋아한다. 이따금 귀찮을 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게임을 즐기고 좋아하는 친구도 싫어하는 장르가 있는데 그게 바로 모바일 게임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앞서 말했듯 싫어한다고는 해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모바일 게임 장르, 특히 가챠 게임에 대해서 말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이니 아무래도 무슨 즐거움이 있긴 할 텐데 도저히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우리 단톡방에도 가챠 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꽤 많아서 어떤 재미로 그 게임들을 하는지 외부자의 눈으로 꽤 밀접하게 바라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 당장 설치하고 게임을 즐겨보면 알 일일 테지만, 관심이 없는 것에 그만한 시간을 쏟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세상은 넓고 게임은 많으니까 말이다.
내 애인도 이따금 게임을 한다. 애인은 나와 정반대로 모바일 게임을 주력으로 하는데, 잠깐 한눈을 팔다가 다시 애인을 보면 어느새 핸드폰 게임을 켜고 목을 쭉 내밀며 게임에 집중하고 있곤 한다. 어떤 점이 재밌느냐고 굳이 묻진 않았다. 어떤 재미가 있긴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어제 애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11시가 넘어서야 잘 자라는 연락이 왔다. 무엇을 했는가 하니, 게임을 하느라. 애인은 자신이 이룩한 것들을 신이 나서 나열했다. 내가 다크소울을 한창 할 당시, 온슈타인, 스모우 두 명의 협공을 겨우 깨고는 신이 나서 바로 친구에게 전투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애인은 하늘섬을 올라가기까지의 경위를 낱낱이 밝혔다. 산봉우리 3개를 기어가서 봉황을 경운산으로 퍼즐 맞추고 기계를 작동시키고 바람기둥을 타고 부유석을 하나씩 건너면 또 바람기둥이 나오고 또 부유석 건너고, 건너다가 떨어지면 다시 부유석 건너고 하는 식으로 과정 하나하나의 디테일에 대해 설토했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오기였음을 순순히 실토했다. 또한 앞으로 잠깐 게임을 쉬어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애인의 집요함에 존경을 표하면서 한껏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마 나는 애인과 애인의 취향 덕분에 타인의 취향을 도매가로 처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21. 02.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