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을 열면 감정노동을 타협해야 해

1일 1커밋 #44

by 김디트

집에 도착한다. 참 편안해야 할 집이지만, 도착하고 문을 열기 직전까지는 조금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 예컨대 확률형 게임의 뽑기, 이하 가챠 게임의 가챠를 뽑는 마음가짐, 혹은 포커의 마지막 패를 살며시 뒤집어보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한다. 그 두근거림은 집을 비운 시간과 정확히 비례한다. 현관문의 도어락을 삐, 삐, 삐, 삐 누르고 달깍. 그리고 끼이익. 불이 켜져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데 차라리 불이 켜져있지 않을 때라면 조금 안심. 가끔 함정이 있기도 하지만 그 정도면 그나마 높은 등급을 뽑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불이 켜져 있으면 조금 위험 신호. 불이 켜져 있는 데다가 시끌벅적한 소리까지 난다면 완전히 망한 것이다.


일단 성공한 날의 개략적인 시나리오는 이렇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서서 불을 켠다. 완전히 깔끔하진 않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최소한의 마지선으로 적당히 정리되어 있는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조금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싱크대를 바라본다. 싱크대는 비어 있지만, 식기 건조대엔 식기들이 몇몇 늘어서 있다. 설거지를 하고 난 후 다 말린 접시는 제때 찬장에 넣지 않으면 다른 설거지거리들에 침범당해 다시 축축 눅눅해지기 때문에, 눈썹이 조금 꿈틀. 늘 그 다 말린 식기들을 찬장에 넣는 건 나의 몫이다. 동거인들의 둔감함에 투덜거리며 나는 일단 내 방으로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식기를 정리하고 물을 한 컵 마신다. 거실 탁자가 조금 더러워져 있으면 행주를 적셔서 훔치고, 먼지가 굴러다닌다 싶으면 청소기를 살짝 돌린다. 방금 사용한 헹주를 대충 빨아서 넌다. 이 정도면 선방 한 거지,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소파에 주저앉는다.


반면 완벽히 실패한 날. 이런 날엔 뭘 할 것도 없이 내 방으로 직행해야 한다. 대부분은 동생이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있는 상황이다. 거실이 실시간으로 엉망진창이 되는 걸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하겠으므로 후다닥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거실의 상황을, 그 상황 후에 있을 동생의 아마도 미흡할 뒤처리를 애써 무시하려 애써야 한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날도 있다. 선배가 라면을 거나하게 끓여먹고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다거나. 동생이 TV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거나. 가장 보통의 상황이다. 나는 쌓인 설거지 거리 하며 거실의 난장판에 얼핏 눈치를 주며 한담을 나눈다. 나는 나대로 또 말하면 잔소리지 하고,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또 잔소리하려고 각재고 있구나 하니 내가 그냥 말을 삼키고 말지 하며 움찔거리는 눈썹을 애써 잡아 끈다. 나의 오랜 잔소리들이 쌓이고 쌓여서 아무튼 어떻게 되었든 설거지 정도는 확실히, 언젠가는, 하루 안에는 하게 되었으니까 그 신뢰를 담보 삼아서 말이다.


어느 웹툰의 '잔소리' 관련한 에피소드를 볼 때였다. 그 웹툰의 베스트 댓글에는 '시키게 만드는 것도 진 빠지는 일이고 감정노동'이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 대목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노동이다. 그리고 결국 노동이므로 적정 선에서 타협을 봐야 했다. 난 워커홀릭이 아니었으니까. 누가 더 많이 일을 하니, 손해를 보니 하는 이해득실의 경중을 따지는 것조차도 잔소리요, 감정노동이었으니 결국엔 내가 나 스스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번아웃이 찾아와서 일을 줄이는 프리랜서의 심정이 이런걸까.


아마 이 타협에는 나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꽤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릴 때부터 대한민국의 장남으로서 길들여 온 그 콤플렉스는 이따금 가해자의 심정까지 헤아리라며 나를 가로막았다. 그러면 결국 타협을 하고 그냥 내가 해버리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늘 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순종적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이따금 나의 성질머리와 부딪혀서 불협화음을 내곤 했다. 나는 은근히 짜증이 많고 고집이 센 스타일이었으니까. 불협화음은 억지웃음을 짓고 약간의 비꼼을 담은 농담처럼 변해서 칠판 긁은 소리 같은 느낌으로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런 말이 튀어나오면 동거인들은 이윽고 나의 눈치를 살살 보며 상을 닦거나, 물건을 치우거나, 쓰레기를 비우러 갔고, 나는 후회했다. 이런 비열한 수를 쓸 바에야 그냥 타협하자. 결국 타협하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만다.


결국 조금 더 민감한 사람이 조금 더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지만.


"너네 집 너무 더러워."


애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애인에게는 내가 바로 그 둔감함의 가해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조금 겸연쩍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1. 0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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