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스테레오 타입 해커와 만난다

1일 1커밋 #71

by 김디트

가만히 앉아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코드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IDE가 마치 우주가 별을 품은 듯이 색색의 코드들을 가득 끌어안고 나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지엽적인 것들에 정신이 빼앗겨서 그 전체적인 색감, 주황색이며 파란색이며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그 전체적인 뉘앙스, 예술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떤 예술 작품을 이끌어냈을지도 모를 그 혼돈스러운 질서 정연함에 신경을 쏟을 새가 없었다.


누군가는 이런 깊고 숙연한 집중의 시간이 프로그래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나 다름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너저분한 책상, 분주하게 키보드 키캡을 두드리는 손가락, 부스스한 머리를 한 해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당연하지만 여러 매체가 반복적으로 노출시켜 만들어낸 스테레오 타입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코드를 작성하는 일은 그렇게 다이나믹하지도 않고 급박하지도 않다. 누군가는 코딩은 구글이 해주는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그 농담 속에는 뼈가 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키보드보다는 마우스, 그중 마우스 휠을 주로 사용하며, 타이핑보다는 읽어 내려가는 일이 많다. 그리고 거기서 찾아낸 작은 아이디어, 혹은 해결법을 뿌리 삼아 코드라는 성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아마 생업에 가까운 글을 쓰는 작가님들도 프로그래머와 비슷한 방식으로 글을 조립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사실 글쓰기가 코드 작성보다 좀 더 어려울 것이다. 코드는 이미 존재하는 프레임과 규칙에 나의 아이디어를 끼워 맞추는 정도일 뿐이니까. 아마 비유하자면 팬픽을 쓰는 것과 비슷할까. 기성 작가가 만들어둔 수많은 아이디어와 문체가 널려있고 그걸 잘 끼워 맞춰 상상력을 발휘하는 식일 테니까.


팬픽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팬픽을 쓰기 위해 오늘도 골머리를 썩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스테레오 타입을 답습하는 방식으로 골머리를 썩진 않았다. 주위를 서성거리며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TV 앞에 앉아서 올라가 있는 우리 게임 테스트 빌드도 잠깐 플레이해봤다가 하는 식으로 자리를 벗어나서 보내는 시간도 제법 길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도 슬쩍 친구들과 메신저를 하거나 정보의 바다 위에 서핑 보드를 얹고 잠깐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조금 규칙이 느슨한 듯해 보이는 일반적인 직장 생활을 구가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면 내 마음이 내 귀에 속삭이곤 한다.


'그 꼴이 프로그래머라고 할 수 있겠어?'


고백하자면 나부터가 프로그래머의 스테레오 타입의 망령에 제대로 콩깍지가 씌여 있다. 앞서 그건 프로그래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니 뭐니 했지만 가끔 그 우주보다 깊은 IDE를 바라보고 깊이 심취해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혼자서 히히덕거리며 만족감을 드러내 버리고야 만다. 코드의 핵심적인 문제에 접근하는데 모든 열과 성을 쏟아붓는 그런 상태를 나는 늘 갈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잘 되진 않지만. 그런 깊은 집중의 시간으로 향하는 길은 늘 고되었다. 아마 평생 고될 테지. 수많은 흥밋거리들도 평생 내 눈 앞에서 얼씬거릴 테고 그럴 때마다 수십 번 수백 번 고개를 돌려 한눈을 팔 것이다.


그래도 역시 가끔 이렇게 집중해서 코드와 일대일 대면을 하는 일은 즐겁다. 다른 이들이 빨리 퇴근하자고 채근하는 와중에도 코드 한 줄을 더 검토하고 싶어 지는 마음. 아마 퇴근을 하고 나면 다시 이 스테레오 타입과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즐겁고 아쉬운 일이었던 걸 테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비 때문인지 가방 때문인지, 결국 나 때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