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때문인지 가방 때문인지, 결국 나 때문이지만

1일 1커밋 #70

by 김디트

애인과는 3, 4개월만 더 있으면 햇수로 벌써 7년이 다 되어간다. 한해 한해 레벨이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숫자가 올라가는 데 대한 자부심 같은 게 은연중에 쌓인달까. 그 자부심의 아래에는 물론 우리가 쌓아올린 역사들이 막 이사한 직후, 나에게 이렇게 많았나 싶은 마음으로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 보게 되던 그 높게 쌓인 책들처럼 쌓여 있고 말이다. 늘 시간이 흘러가는 걸 모레 알갱이 붙잡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나였지만, 적어도 애인과의 관계 사이에서는 흘러간 시간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아마 이건 건강한 관계라는 신호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올해는 조금 비싼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가방. 이유는 있었다. 애인은 농담처럼, 마치 남녀 관계의 결정적인 메타포라도 되는 것처럼 곧잘 '가방 사줘!' 하고 말하며 히죽 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로 가방을 선물해 버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사하게 웃을까, 아니면 미묘한 표정을 지을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하기만 할 게 아니라 그 표정을 정말로 자아내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그 정도의 재력은 갖추게 되었고.


오랫동안 그 '재력'이라는 놈은 나를 빗겨갔다.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인과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 때의 나는 가난한 대학생에서 아직 채 벗어나지 못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악질 회사를 만나서 주머니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는 일이 잦았다. 우리는 대학생보다 더 대학생 같은 데이트를 하곤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데이트였다. 예컨대 지금은 웬만한 식당에서는 가격표를 보지 않고 카드부터 내밀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가격표를 보기 전까지는 지갑을 꺼내긴 커녕 가게에 들어가는 것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애인도 그렇게 풍족하진 않았었고, 그래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찔끔 나는 것만 같다. 격세지감이라고나 할까.


올해 그런 마음을 먹었고 또한 선물을 줄 기회도 많았다. 이를테면 연초. 그것도 아니면 화이트 데이. 나는 올해가 되면서 애인에게 '반드시 가방을 사주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이 민망하게도 난 결국 아직까지 가방을 사주지 못했다. 이유야 많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들은 모두 핑계고, 나는 사실 정말 본격적으로 제대로 진심으로 애인에게 가방을 안겨줘야겠다, 뭐 그런 마음을 완전히 먹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정말 사주고 싶었다면 진작에 사줬어야 했을텐데.


그래서 2주 전, 이제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이번주 토요일에 반드시 아울렛으로 가자. 차를 빌리겠다. 여주 아울렛으로 가자. 이렇게 선포했다. 애인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이내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좋아!' 하고 하이톤으로 소리 지르면서 한 차례 춤사위를 선보였다. 나는 결의를 굳게 다지면서 주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주말. 엄밀히 따지면 주말 직전의 금요일. 야심차게 토요일을 기다리던 난 이번에도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푹 숙인 시선 아래로는 '토요일, 비' 하는 일기예보가 스마트폰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도 잘 못하는데 비오는 데 운전해서 되겠냐고 대답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에 입을 꾹 닫아야 했다. 다음주에는 반드시, 반드시 가자! 애인은 또 해맑게 웃으면서 박수를 치며 응수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그러니까 저번주 금요일. 나는 또 머리를 푹 숙인채로 일기예보를 바라봐야 했다. 머리 위로 작은 먹구름이 따라다니면서 비를 쏟아내는 건 아닌가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토요일만 되면 비가 오냐."


회사 동료분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난 웃을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 주에 가자!"


애인은 이번에도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설레발을 꾹 누르면서 고개만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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