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을 오만하게 상상하기

1일 1커밋 #88

by 김디트

내가 한옥 마을에 간다고 하니 회사 동료분은 말했다. 아니, 경주에서 실컷 보던 걸 왜 또 보러 가려고 그래? 나는 최신식 한옥과 그런 삶의 때가 가득 묻은 한옥은 다른 것이라고 웃으면서 맞받아쳤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했다. 감흥이 크게 없었다고나 할까. 경주에서 한옥이란 걸 진심으로 대한 적도 없으면서 알게 모르게 한옥 같은 것, 하고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옥 마을에 가는 건 한두 달쯤 전, 애인이 성과급을 받았다며 나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겠다고 했을 때 돌연 정해진 일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줄줄이 이어서 나오는 비엔나 소시지 같은, 하지만 비엔나 소시지 따위와는 질적으로 크게 차이 나는 코스 요리를 이리 찔끔, 저리 찔끔 먹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사실 그 코스 요리를 막상 마주하기 이전까지의 내 마음이 딱 한옥 마을에 가기 전의 내 마음과 똑같았다. '코스 요리 같은 것'이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어. 보통 음식이랑 뭐 얼마나 다르겠어. 그런데 달랐다. 물론 맛도 달랐지만 그 분위기, 나를 고급스럽게 대하는 서비스하며, 잔잔한 음악, 달그락 소리마저 고풍스러운 식기들이 한데 모이니까 나의 존재 자체에까지 그 '다름'을 행사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황송함 때문에 문득 애인이 가고 싶다고 한 한옥 마을을 예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어김없이 얕잡아 보는 마음이 송글 송글 솟아나는 것을 보니, 아마 나는 평생 이 '경험하기 전의 오만함' 같은 걸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한옥 마을은 좋았다. 코스 요리를 먹을 때처럼, 하지만 무척이나 다른 방식으로 좋았다. 결이 살아있는 한옥 건물과 바닥, 다도용 찻잔,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여닫이 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테라스 형태의 마루 같은 것들이 모두 신선했다. 애인도 그랬던지 테라스로 나가서 도도도, 이리저리 도도도, 했다. 산세가 좋다느니 한옥 지붕의 곡선이 아름답다느니 온갖 너스레를 다 떨더니 방으로 들어오면서 발에 꽃가루가 잔뜩 묻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신선한 하루를 보냈다. 한옥과 산과 꽃과 담벼락 따위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산책을 했고, 숙소에서 챙겨주는 저녁 식사를 느긋하게 맛보면서 나뭇결이 살아있는 식탁에 축 쳐져 있기도 했고, 아직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면서 밤 산책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다. 그 모든 경험은 우리 집에서 할 때와 완전히 같으면서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다음 날. 이제는 이 한옥 마을에 제법 적응했다, 이제 날 놀라게 할 일은 없을걸. 또 스멀스멀 그런 거만한 생각이 올라올 때쯤, 한옥 마을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또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 마는 듯, 먹구름이 가득 낀 하루였다. 우리는 짐을 챙겨서 체크아웃을 하고 인근에 위치한 절로 향했다. 절 입구에 있는 찻집에 앉아서 팥죽을 먹으면서 한참 담소를 나누던 중,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어디서 나는 소린가 하니 창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폭우였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바깥 풍경은 마치 연습장에 연필을 비스듬히 눕혀서 마구 긁어 그린 선 같았다. 당연히 우리는 우산은커녕, 우산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또 새로운 걸 맛보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난처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그릇 밑에 남은 팥죽을 긁었다.


그 후 택시를 잡느냐 마느냐 하다가 찻집 카운터에 물어봐서 고장 난 장우산을 얻을 수 있었다. 애인과 나는 부처님의 공덕은 역시 넓고 깊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며 그 세찬 빗길을 뚫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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