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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뉴 Dec 20. 2023

번아웃이 불건전하게 왔으면 좋겠어

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는데, 어제저녁 새벽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며 넷플릭스 쇼프로를 보느라 늦게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일도, 넷플릭스를 보는 일도(아예 구독조차 하지 않았다), 하물며 새벽에 잠이 드는 일도 없는 내겐 이상하게도 파격적인(?) 일상 이야기였다.

동료는 조부모 육아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같은 점은 '육아가 1순위가 될 수밖에 없는 워킹맘'이라는 사실이었다. 서로의 면면이 '네가 더 편한 점'을 읊어주다가도 결국 '그래 그것도 참 힘들지'로 끝나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 일을 하며, 이상하게도 술이 마시고 싶었다.

요즘 나는 심한 번아웃을 앓고 있다. '번아웃이 왔다'는 걸 말하는 것이 우습다. 마치 요즘의 중2병 사춘기 청소년들의 유행어가 '나 우울증이야'가 됨으로써 진짜 우울증 환자들의 병세가 가벼이 보이는 느낌이다. 내가 '나 번아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번아웃 어른들의 증상의 평균을 낮추고 있는 게 아닐까 한없이 조심스럽다. 일하기 싫어지는 게 번아웃? 육아가 힘들어지는 게 번아웃? 이 세상의 4천만(??) 육아 맞벌이 부부들은 그럼 모두 어떻게 살고 있지? 스스로가 아프고 힘들다는 걸 인정하는 게 너무나 낯 뜨겁다.

친구에게 '너무 힘들어서 운동을 더 많이 하기 시작했다'라고 말을 하니 '체력을 더 키우려고 그러는 거야?'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아니, 그게 아닌데... 운동을 하면 생각이 없어지고,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고, 아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이런저런 탈출구로써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어찌 허울 좋은 변명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힘들어서 어제 술을 마셨어'라는 말이 더 그럴싸해 보이잖아! '요즘 삶이 힘들어서 새벽운동을 시작했어'라는 말은 아직도 살판난 사람의 대사 같다. 그래서 허둥지둥 덧붙였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에 코피가 났나 봐..."

남편의 정규 야근인 수요일, 어젯밤 남편은 "왠지 야근하고 나면 옆자리 차장이 한 잔 하고 오겠다고 할 것 같은데, 내일은 오래간만에 마시고 올게."라고 말했다. 늘 거절만 해 왔는데 이번주는 연말이고 하니 한 번 마셔주겠다(?)는 일종의 배려 섞인 말이었다. 어차피 남편의 귀가 시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리미트가 해제되어 사실상 언제 들어와도 관계가 없으므로(즉, 8시 전에 귀가하지 못하면 그 뒤로는 새벽 1시에 들어와도 육아에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알겠다고 말했다. 남편이 없으니 애들 재우고 혼자 운동이나 할까? 아차차, 나 운동 줄이기로 했지. 스스로 맘을 고쳐먹는 게 웃긴다. '운동이 과하니 운동을 줄이자.' 그렇다면 그땐 뭘 하지? 혼술?

친구의 어젯밤 일탈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나도 술이 마시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오늘 밤 캔맥주 따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오늘 나의 퇴근 후 일과는 혼술이 아닌 혼육인데. 누구보다 당차게 '육퇴 후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게 우습다. '저녁에 술 마시면 내일 새벽에 운동을 못해.' 아직 번아웃이 제대로 덜 온 걸까?

방탕한 번아웃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도 술, 내일도 술을 먹으며 고주망태가 되어 출근하고 싶다. "너 요즘 왜 이래?"라고 묻는 남편의 질문에 "나 요즘 힘든 거 잘 알잖아!"라고 꼬부라진 혀로 투정 부리고 싶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한다. 그럼 내일 새벽에 일어나지 못한다. 이미 내 스케줄러에는 아주 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새벽 공복 유산소하기.

⁠힘들지 않아서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니다. 살맛 나서 운동하는 게 아니다. 너무 힘들다고, 나 요즘 정말 괴롭다고. 그래서 술을 마셨어,라고 말하는 대신 '그래서 운동을 더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내가 배부른 워킹맘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나도 차라리 강제 술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억지로 먹인 술에라도 취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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