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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뉴 Oct 13. 2021

엄마, 이제 기분 좀 풀렸어요?

왜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했을까? 첫째는 언제나 힘든 아이이고, 둘째는 언제나 수월한 아이라고. 나의 투덜이 일기에는 늘 '첫째가 어쩌고 저쩌고~' '아이고 오늘은 첫째가~'로 시작하는 말들이 많지만, 사실 둘째에게도 골머리를 썩게 하는 몇 가지 있다. 첫째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그 고통이 조금 가볍게 느껴질 뿐. 가끔 아이들을 봐주시는 엄마는 "둘째가 힘들게 하면 더 힘들다."라는 말을 하셨다. 절대 힘들게 하지 않을 것 같은 애가 힘들게 하니 더 힘들다는 뜻이다(힘듦탈트 올 것 같다). 딸내미 귀여워 콩깍지가 씐 내 눈에는 애가 눈을 뒤집고 울어도 그저 귀여울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오고야 말았다.


잠 없는 아이와 밥 안 먹는 아이. 나는 전자, 직장 동료는 후자로 가볍게 사담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밥 안 먹는 것보단 잠 안 자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요." 나는 집으로 돌아와 불평했다. "역시 잠 는 애를 안 겪어본 사람은 몰라. 얼마나 힘든지!" 나는 그날 이후로 육아 배틀은 모두 기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직장 동료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둘째로 인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돌 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밥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없던 둘째가, 유아식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밥을 뱉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제 잘 먹던 음식을 오늘은 뱉었고, 여기서 안 먹던 음식을 저기서는 먹기도 했다. 외출을 하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둘째가 울면 감정이 격화된 첫째가 따라 울었다. "엄마, 너무 시끄러워."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다른 아이의 목소리에 나는 괜히 첫째를 타박했다. 그 뒤로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하는 것을 단념했다.


둘째는 김과 고기를 좋아했다. 김과 고기를 주면 모두 먹는다는 뜻은 아니고, 그저 '완식'의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우리는 둘째가 밥 한 숟가락을 들고 도리질을 할 때마다 요란스레 호들갑을 떨었다. "고기가 있네, 고기, 고기!" 그럼 가끔 둘째는 새침한 듯 입을 벌렸다. 때론 인형을 떼로 가지고 와 함께 먹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율동을 하며 아이가 잠깐 정신이 팔릴 때쯤 숟가락을 들이대 보기도 했다. 첫째에게는 금지된 '식사하며 영상 보기' 혜택까지 제공되었다. 그렇게라도 먹으면 다행이었다. 문제는 백 프로 보장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산하게 둘째의 비위를 맞추는 엄마와 아빠를 본 첫째는 '나도, 나도.'를 연발했다. 안 된다고 하기에도 민망하리만치 잦은 횟수에 우리 집 책상에는 밥 먹는 인형 고객들이 늘어났다. '토끼야 너도 먹어.' 귀엽긴 귀여운데, 촵촵 밥 먹는 토끼를 보며 까르르 웃는 둘째는 본인에게 들이대는 숟가락을 보면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알 도리가 없었다.




기분 좋게 퇴근을 했다. 오늘은 일도 별로 없어 여유로웠고, 횡단보도 신호등도 타이밍 좋게 초록불이 되었고, 집에 가는 버스까지 눈앞에 멈춰 주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남편이 야근이라는 것만 빼고는. 살짝 맥이 풀렸지만 탓할 사람은 없다. 기합을 넣고 아이들을 하나씩 주워 모았다. 태권도장에서 한 명, 어린이집에서 한 명. 나의 퇴근길은 당신의 출근길보다 정신이 없다. 집안에 아이들을 풀어놓자 응가하겠다며 소란 떠는 첫째와 다짜고짜 우는 둘째로 벌써부터 혼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저녁 준비를 했다. 다행히 먹을 것이 좀 있다. 고기와 미역국, 우엉과 김 등 각종 반찬을 꺼내고 데우고 끓였다. 오늘은 둘째가 좀 먹어 줄라나? 정성스레 밥의 무게를 쟀다. 50g의 소담한 양. 어째 예전보다 먹는 양이 더 줄었지만 다 먹어줄지도 의심스럽다. 따뜻하게 데운 미역국과 함께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낭패다! 첫 번째 숟갈부터 이미 입을 싹 닫고 울기 시작한다. 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벌써 며칠째 이런 식이었다. 어린이집에서는 분명 잘 먹었다고 했는데? 나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든 오늘 끼니만은 다 먹이고 싶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입을 벌렸던 모든 레퍼런스를 동원했다. 한 숟가락이라도 입에 넣어보면 잘 먹던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숟가락을 들이댔다. 아이는 입안에 밥알을 잔뜩 품은 채 울었다.

무엇이 잘못일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먹을 생각이 없다. 울기만 하는 동생과 잔뜩 지친 얼굴의 엄마를 본 첫째는 우리살폈다. "엄마, 저는 잘 먹죠?" "왜 이렇게 밥을 안 먹지?" 첫째의 고운 말이 기특했지만 모두 대응해주기에는 조금 벅찼다. "응, 그런데 조금만 더 부지런히 먹자." 나의 말에 군말 없이 숟가락을 긁는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한 번 터진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잠깐 방긋 웃는 듯하다가도 숟가락을 보면 울었다. 아예 빈 수저를 쥐어주었더니, 수저를 든 채로 울거나 아예 내팽개치기도 했다.


그만뒀어야 했는데. 나는 둘째와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너무 지쳤던 나는 첫째에게 말했다. "엄마 잠깐만 방에 들어갔다 올게." 엄마가 너무 힘이 들어. 나는 안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냥 안 먹이면 되는 건데. 그런데... 그렇게 계속 아이가 먹기 싫어한다고 안 먹이는 게 사랑이고 교육일까? 좋아하는 음식만 주는 게 애정일까? 마음속의 수많은 엄마들이 싸웠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어! 지금은 '교육' 피켓을 든 엄마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밖에서 첫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제가 XX한테 밥 줬는데 먹었어요. 이제 먹는 것 같아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고만 있을 수는 없어 그 말을 듣고 방 밖으로 나갔다. 타이밍 좋게 첫째가 둘째의 밥을 먹였나 보다. 두 번째는 없었다. 먹지 마! 한 숟갈만... 어휴, 그래 먹지 마라! 이렇게 하면 먹을래? 30분이 넘는 실랑이, 나는 싱크대에 기대 소리쳤다. "아이고... 엄마 너무 힘들다!!"


항상 먹는 것으로는 속을 썩여 본 적이 없는 첫째. 언제부턴가 나는 첫째의 등을 지고 둘째 밥을 먹였다. 첫째는 둘째의 우는 소리에 눈치, 엄마의 큰 소리에 눈치를 봤다. 내가 눈에 띄게 힘들어하자 첫째는 어른스러운 푸념을 계속 해댔다. "어휴, 언제까지 이렇게 안 먹을 거람." "XX야, 이렇게 안 먹으면 오빠가 8살 돼도 계속 안 커." 그 모습이 우습고 기특했다. 먹던 음식을 주먹밥으로 둥글게 말아 손으로 싸 줘 보아도 둘째는 끝내 을 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꺼내느라 바닥에 떨어진 비닐장갑을 고사리손에 꽂아 넣고 첫째는 엄마를 따라 했다. "역시 안 먹네요."

그러게 말이야. 왜 이렇게 안 먹을까.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식판을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나는 아이들의 양치를 시켰다. 첫째의 이를 닦으며, 나는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너무 소리쳐서 미안해. 많이 놀랬지? 엄마가 XX가 밥을 안 먹어서 너무 속상했어." 아이는 칫솔을 입에 물고 웅얼댔다. 잘 먹는 첫째를 앞에 두고 계속 소리 지르고 자리를 비웠던 게 계속 마음에 쓰였다. 아이들이 침대에 폭 파묻혔을 때도, 나는 첫째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말했다. 엄마가 너무 큰 소리 내서 미안해.




나는 알고 있었다. 첫째는 내가 둘째 일로 힘들어할 때 유난히 의젓해진다. 둘째가 계속해서 울고 떼를 쓰면, 아이는 잠깐 귀를 막고 가만히 있다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둘째의 투정에 두 번 자리를 박차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첫째는 문을 열지 않고 두어 번 노크를 한 뒤 나에게 물었다.

엄마, 이제 기분 좀 풀렸어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 더 생겼다. 그것만으로 내 세상은 좀 더 풍만해졌다. 내일은 다른 반찬으로 준비해 봐야지. 하지만 나의 감정싸움으로 첫째의 성장을 당기지는 말아야지. 내일은 둘째가 웃고 첫째가 조잘대는 밥상을 맞이할 수 있길.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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