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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lius May 14. 2015

그림 다섯, 밑줄 다섯 

미술을 소재로 삼은 미술책이나 미술 관련 소설은 아니지만 읽다 보면 미술 작품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술 작품이 주인공이 아니라서 당연히 삽화가 들어가지 않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그 그림도 같이 보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미술 작품을 묘사한 대목과 해당 작품을 모아봤습니다. 

 

 

〈벤슨살인사건〉과〈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 예를 들어 루벤스가 안트워프의 대성당에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을 때 그가 어떤 외교적 용무로 다른 데 갔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유력한 상황증거가 있다면 현대 범죄수사가들은 그것을 루벤스의 작품으로 믿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여보게, 그런 결론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거든. 비록 부정적인 추론이 법률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유력하다 해도 그림 자체는 어디까지나 루벤스가 그렸음을 증명하겠지. 그 이유는 간단하네. 루벤스를 빼놓고는 누구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일세. 거기에는 루벤스의 개성과 천재가, 루벤스만이 지닌 뭔가가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611

- 이미지 출처 :http://www.artchive.com/artchive/r/rubens/rubens_descent.jpg 

- 글 출처: 〈벤슨살인사건〉중에서, S. S. 반 다인, 정광섭 옮김, 동서문화사, 2003



GO와 황혼녘의 격세유전

... 사쿠라이는 달리의 그림 앞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쿠라이가 보고 있는 작품은 〈황혼녘의 격세유전〉이라는 그림이었다. 그 유명한 밀레의 〈만종〉을 재구성한 그림이다. 재구성이라고 해봐야 내 눈에는 악취미의 패러디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안 그렇겠는가, 황혼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남녀 중 남자의 얼굴은 해골로 변해 있고, 여자 쪽의 몸에는 창 같은 것이 꽂혀 있으니. 그리고 전원 풍경은 황량한 바위 벌판으로 변해 있으니. "정말 멋지다." 사쿠라이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라이는 내 표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쿠라이는 많은 시간을 달리의 그림 앞에서 보냈다. 코끝이 그림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몸을 쭉 앞으로 내밀고 바라보기도 하고, 킬킬거리고 웃으면서 바라보기도 하고, 간혹은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며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내내 그런 사쿠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도 싫증나지 않았다. ...
살바도르 달리, 황혼녘의 격세유전, 1933~1934

- 이미지 출처: http://uploads3.wikiart.org/images/salvador-dali/atavism-at-twilight.jpg 

- 글 출처: 〈GO〉중에서, 가네시로 가즈키, 김난주 옮김, 북폴리오, 2006



수도생활의 역사 2와 성 도미니코

불란서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방스의 도미니코회 성당 벽에 얼굴 없는 도미니코의 형상을 그렸다. 그 얼굴은 어떤 화가가 말한 것처럼 "입도 코도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보기 위하여 더 이상 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생 일대 작업의 종합인 이 '기념물'에서 늙은 화가는 도미니코가 '빛의 모습'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프로방스의 성당 벽에 있는 도미니코는 빛에 흡수되었다. 형제들을 신뢰하고 하느님 안에 확고히 서 있었던 교회의 아들이며 봉사자였던 도미니코는 사람들과 단체들 앞에서 자신을 사라지게 했다. 그는 형제들 가운데 살면서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침대도 자기 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미니코의 신중함은 겸손과 포기의 특성을 지닌다. 사실상 도미니코는 포기에 대한 참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순교에 대한 그의 강한 갈망과 고행으로 나타났다.
앙리 마티스, 성 도미니크, 1951

- 이미지 출처: http://www.lifo.gr/uploads/image/744312/choeur-de-la-chapelle-du-rosaiire-de-matisse-c3a0-vence.jpg 

- 글 출처: 수도생활의 역사 2중에서,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강운자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2002 



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와 훔친 입맞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프랑스 미술 전시실입니다. 이곳은 마치 길게 내쉬는 한숨처럼 섬세합니다. 신고전주의 천장 아래에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비둘기색 벽과, 회전을 거듭하는 미뉴에트가 펼쳐지는 상감 세공을 한 플로어 그리고 이쪽 긴 벽에 있는, 아름답지만 무거운 새틴 가운을 입고 있는 젊은 여인과 어둠 속에서 몸의 반을 문 뒤에 숨긴 그녀의 젋은 연인. 그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려고 합니다. 여인은 우리를 보고 있지는 않지만, 마치 사슴처럼 긴장하고 있습니다. 골똘히 귀를 기울이면서, 언제라도 옆방의 여인들이 이곳으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여인은 무슨 소리가 들리면 급히 도망을 치기라도 할 기세입니다. 길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통은 연인과의 부드러운 임맞춤을 위해 쭉 뻗은 팔과 함께 팽팽하게 늘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카프의 투명한 주름 속으로 곧 사라질 것입니다. 프라고나르  Fragonard는 이것을 '훔친 입맞춤 The Stolen Kiss'이라고 불렀지만, 남자는 여인에게서 무언가를 훔치는 것이 아닙니다. 훔친 것은 여인이 사라지기 전 바로 그 순간입니다.
장 오노레 프리고나르, 훔친 입맞춤, 1780s

- 이미지 출처: http://www.wga.hu/art/f/fragonar/father/2/11stolen.jpg 

- 글 출처: 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중에서, 데브라 딘, 송정은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동물원에 가기와 〈자동 판매식 식당

... 〈자동 판매식 식당 Automat(1927)에서는 여자가 혼자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다. 늦은 시간이다. 여자의 모자와 외투로 보건대 밖은 춥다. 여자가 있는 실내 공간은 크고, 불은 환하고,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장식은 기능적이다. 돌을 덮은 탁자, 튼튼하게 만든 검은 나무 의자, 하얀 벽. 여자는 사람을 꺼리는 듯하고 약간 겁을 내는 것 같다. 공공장소에 혼자 앉아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다. 무슨 일인가 잘못된 모양이다. 그녀를 보다 보면 어느새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 배신이나 상실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그녀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손을 떨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북미의 어떤 큰 도시, 2월의 밤 열한 시쯤일 것 같다.

 〈자동 판매식 식당은 슬픔을 그린 그림이지만 슬픈 그림은 아니다. 이 그림에는 위대하고 우울한 음악 작품 같은 위력이 있다. 실내 장식은 검박하지만, 장소 자체는 궁색해 뵈지 않는다.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혼자 일 수도 있다. 이 여자와 비슷하게 생각에 잠겨, 이 여자와 비슷하게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남자와 여자들. 이런 공동의 고립은 혼자인 사람이 혼자임으로 해서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유익한 효과가 있다. 호퍼는 고립되어 있는 이 여자와 공감을 느껴보라고 우리에게 권유한다. 그녀는 위엄 있고, 관대해 보인다. 어쩌면 지나친 듯싶게 남을 잘 믿고, 약간 순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세상의 단단한 모서리에 부딪힌 것일 수도 있다. 호퍼는 우리를 그녀 편에, 중심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에 밀려난 사람들 편에 세운다. ... 
에드워드 호퍼, 자동 판매식 식당, 1927 

- 이미지 출처: http://www.edwardhopper.net/images/paintings/automat.jpg 

- 글 출처: 동물원에 가기 중 "슬픔이 주는 기쁨" 중에서,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이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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