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힘
작년 말, 씽큐베이션(독서 모임) 3기 마지막 오프라인 모임에서 2019년 1월부터 12월까지 각 달에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하려 해 봐도 2월과 8월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2월과 8월, 2달의 시간을 초로 환산하면 무려 51만 초에 달한다. 이 많은 순간들에 대한 기억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는 왜 어떤 경험은 기억하고, 어떤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는 걸까?
책 <순간의 힘>에 따르면,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기억할 때, 대부분의 사건을 무시하고 몇몇 특정한 순간만을 떠올린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당신의 자식들과 롯데월드에 놀러 갔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매 시간마다 당신에게 문자를 보내 롯데월드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짤막한 요약과 함께 1부터 10까지의 점수를 매겨 답장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이 내게 보낸 답장은 다음과 같다.
- 오전 9시: 호텔에서 애들을 데리고 나옴. 다들 들떠서 제정신이 아님. 6점
- 오전 10시: '후룸라이드'라는 놀이기구를 탐. 애들이나 어른들이나 서로 이런 걸 좋아하나 보다, 하고 꾹 참고 견딘 듯. 5점
- 오전 11시: '아틀란티스'라는 롤러코스터를 타고나니 도파민이 급상승함. 아이들도 한 번만 더 타자고 조름. 10점
- 오후 12시: 롯데월드에서 파는 완전 비싼 음식을 먹음. 이 돈이 다 자기들의 대학 등록금이라는 걸 알면 애들도 저렇게 좋아하진 않을 텐데. 7점
- 오후 1시: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잠실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45분째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 아들이 난간을 물어뜯지 못하게 말려야 했음. 3점
- 오후 2시: 디즈니랜드를 나오면서 미키마우스 귀가 달린 모자를 삼. 애들한테 씌우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귀엽다. 8점
이 날 하루가 전체적으로 어땠는지 평가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보낸 점수들의 평균을 내보는 것이다. 평균 점수는 6.5점. 이제 그로부터 몇 주일 뒤 당신에게 이 날의 경험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 점수를 내려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우리는 6.5점과 비슷할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대답은 다르다. 그들은 종합적으로 9점을 매길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사례의 경우에는 2가지의 순간이 중요하다. 롤러코스터를 탄 순간과 미키마우스 모자를 산 순간이다. 왜 이 사건들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사람들은 경험을 평가할 때 대개 2개의 중요한 순간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최고 또는 최악의 순간을 뜻하는 절정(peak)과 마지막(end)이 그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절정-대미 법칙(peak-end rule)이라고 부른
다. 즉 당신은 롤러코스터(절정)와 미키마우스 모자(마지막)를 기준점으로 삼아, 당신의 기억은 문자로 제공한 실제 정보보다 훨씬 즐거웠던 것으로 남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경험, 더 나아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절정과 대미라는 결정적인 순간들로 판단한다.
결정적인 순간들이 왜 중요한지 충분히 이해가 됐을 것이다. 자신의 삶이 더욱 풍부해지길 바란다면, 그러한 순간들을 의도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더 많은 결정적 순간을 창조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순간의 힘>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음 4가지 요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 고양(Elevation):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 결정적 순간은 평범함과 일상적인 순간들 사이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고양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감각적 쾌감을 맛보며 가끔은 놀라움의 요소가 곁들여지기도 한다.
- 통찰(Insight): 불현듯 진실을 깨닫는 순간. 결정적 순간은 우리 자신 또는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한다. 몇 초 또는 겨우 몇 분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에 우리는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 긍지(Pride): 내가 나이길 잘했다고 믿는 순간. 결정적 순간은 우리가 최선의 모습을 드러낼 때 발생한다. 성취의 순간, 용기의 순간들을 창조하려면 긍지와 자부심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알아야 한다.
- 교감(Connection):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순간. 결정적 순간은 사회적인 경험이다. 결혼식, 졸업식, 함께 본 스포츠 경기 등, 이런 순간들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위 4가지 요소 중 적어도 하나를 포함하지만 반드시 4가지 모두를 포함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위와 같은 순간이 언제 필요한지를 아는 사고방식 또한 필요하다. 이를 '순간 중심적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지 구분하고 식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일, 결혼식, 졸업식, 명절, 새해 등 누구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이 모든 기념일은 시간에 형태를 부여하고 싶었던 어떠한 인간들의 작품이다. 인위적으로 어떤 순간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 사람들, 그들은 순간 중심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의도적으로 결정적인 순간들을 만들기 위해선 그들처럼 특별한 순간이 언제 필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즉, '순간 중심적 사고'를 배워야 한다. <순간의 힘>에는 순간 중심적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3가지 상황에 대해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전환점, 이정표, 구덩이다.
전환점은 결정적 순간의 가장 전형적인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이라는 전환점은 의식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적 순간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발생적인 결정적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의도적으로 매끄럽게 가다듬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더욱 인상적이고 의미 깊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새해 다짐을 하곤 한다. 와튼 경영대학원 교수인 캐서린 밀크먼은 이렇게 말했다.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과거를 지우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새 출발 효과'라고 하죠."
우리는 작년과는 완전 다른 마음가짐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하며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기 아주 좋은 날임에 틀림없다.
인생의 전환점을 기념하는 결정적 순간이 있는 것처럼 특정한 이정표를 기념하는 순간들도 있기 마련이다. 100일 기념 커플 반지, 결혼 5주년 여행, 3년 근속 기념 특별 휴가, 환갑잔치 등. 우리는 전환점에 비해 이런 순간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저절로 알아차리는 본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환의 순간이 그랬듯이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중요해질 수 있는 이정표들은 쉽게 간과된다.
인터넷 기사를 나중에 읽을 수 있게 핸드폰에 저장해주는 포켓(Pocket) 앱은 사용자가 읽은 기사 분량이 1만 단어에 이르면 이를 알려준다. 운동용 팔찌인 핏빗(Fitbit)은 사용자가 각각의 목표를 달성하면 배지를 부여한다. 이런 회사들은 의도적으로 결정적 순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이메일 혹은 알림 문자 한 통으로 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이러한 기념비적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뿐이다.
순간 중심적으로 사고하려면 전환점과 이정표뿐만 아니라 '구덩이' 경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경험은 부정적인 결정적 순간이며, 고통과 괴로움, 시련의 순간이다. 구덩이는 채워져야만 한다. 구덩이가 계속 그 자리에 있다면 또다시 그곳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사람들이 긴 대기 줄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구덩이를 채우기 위해 방문객들의 관심을 분산시킬 흥미로운 볼거리를 배치한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소통할 배우들을 고용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당신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우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기 위해 결정적 순간에 관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그들의 옆을 지키고 보살펴주면 된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런 구덩이가 때로는 절정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서비스 접점에 관한 한 연구에서는 응답자들로부터 최근에 항공사, 호텔 또는 레스토랑 직원과 접했던 가장 만족스럽거나 불만스러운 경험을 수집했는데, 거의 25퍼센트가 '서비스 실패 경험에 대한 직원들의 대응'이었다. 고객이 불만과 취약함을 느끼는 순간을 포착하는 비즈니스 리더는 경쟁자들에 비해 쉽게 차별화를 이룰 수 있다. 고객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자 보상일 뿐만 아니라 사업에 도움이 되는 이점도 얻을 수 있다.
당신이 결정적인 순간의 요소들을 이해하고, 순간 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더라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걸 실행으로 옮기느냐 안 옮기느냐일 것이다. 아무리 통찰이 있더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그 순간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작년 2월과 8월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이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다. 또다시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다. 이때다 싶으면 바로 실행하자. 내 인생을 바꿀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자. 나를 바꿀 수 있는 건 바로 나 자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