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밖의 경제학
IT 제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픈소스에 대해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더 빠르게, 더 나은 IT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잘 만들어진 오픈소스를 활용하는 건 이제 필수 아닌 필수가 되었다. 나도 지금까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오픈소스를 돈 하나 들이지 않고 가져다 써왔다. 그런데 가끔 이런 의문이 들곤 한다. "이걸 만든 사람은 뭘로 먹고 사는 걸까?"
물론 오픈소스로 돈을 버는 기업이나 개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상업적 소프트웨어 시장에 비하면 훨씬 적은 것이 사실이다. 또 오픈소스는 만든다고 끝이 아니다. 유지보수는 물론 더 나은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순전히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오픈소스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일을 하거나 외주를 받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지금 같은 대 자본주의 시대에 도대체 무엇이 돈보다 중해서 자기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돈이 안 되는 일을 한단 말인가? 책 <상식 밖의 경제학(원제: Predictably Irrational)>를 통해 그에 대한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상식 밖의 경제학> 저자 댄 어리얼리는 우리가 2개의 세계, 즉 사회규범이 우세한 세계와 시장규칙이 우세한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규범이란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들을 말한다. 선의의 행동, 신뢰, 사랑, 사명감 등이 이에 해당한다. 금전적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감정적인 영역이다.
시장규칙은 돈을 매개체로 행해지는 모든 것이다. 예를 들어 수익, 비용, 이자, 금전적 거래가 이에 해당한다. 사회규범과는 달리 주고받음이 명확하고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매우 계산적이고 이성적이다.
두 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무래도 '돈'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냐 아니냐겠다. 그렇다면 오픈소스를 개발하는 것은 과연 어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일까? 대체로 돈이 오가질 않으니 사회규범에 해당할 것이다. 즉, 개발자들은 오픈소스를 사회규범의 세계로 바라보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개발자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돈이 아닌 어떠한 명분(사회규범)에 자기 시간을 투자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많다. 그중 책에서 언급된 한 가지 예를 살펴보자.
미국 퇴직자 협회는 몇몇 변호사들에게 가난한 퇴직자들을 위해 시간당 30달러의 저렴한 비용에 법률서비스를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변호사들은 거절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미국 퇴직자 협회의 담당자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는 변호사들에게 가난한 퇴직자들을 위해 무료로 법률서비스를 해줄 수 있는지 재차 물었다. 놀랍게도 변호사들은 승낙했다.
돈이 언급되자 변호사들은 시장규칙을 적용하면서 제안받은 액수가 그들의 수입보다 적다고 생각하여 거절했다. 하지만 돈을 언급하지 않자 사회규범을 적용하여 기꺼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시간을 내준 것이다. 그렇다면 왜 30달러의 비용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일까? 저자 댄 어리얼리는 일단 시장규칙이 사람들 마음에 자리 잡으면 사회규범이 밀린다고 말한다. 즉 두 세계가 충돌할 때 시장규칙이 사회규범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 규범(여기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선한 의도)을 해쳐 버린다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보다시피, 사회규범이 자리 잡은 곳에 시장규칙을 적용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발생한다. 자칫 사회규범 세계에 시장규칙을 적용하려 하면 그 세계는 시장규칙 세계로 오염되기 쉽다. 실제로 오픈소스 생태계에 시장규칙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831
SKT는 자사의 오픈소스 프로그램 '메타트론 디스커버리'를 홍보하기 위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대대적인 경품 이벤트를 진행했다. 오픈소스 생태계의 유일무이한 플랫폼인 깃허브에서는 어떤 오픈소스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보통 사람들이 눌러준 'Star'의 수로 측정되곤 한다. SKT는 자사의 오픈소스에 이 'Star' 수를 올리기 위해 이벤트를 벌인 것이다.
사회규범의 세계인 오픈소스 생태계에 SKT의 시장규칙이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격분하며 오픈소스 생태계를 시장규칙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 이벤트 담당자는 사회규범과 시장규칙 세계에 서로 다른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오직 더 가치 있는 오픈소스를 만들기 위해 무보수로 자기 시간을 투자한 개발자들의 의도와 명분을 우롱한 웃지 못할 사건이 되고 말았다.
이후 며칠 논란이 계속되자 이벤트를 조기 종료하고 사과문을 올리면서 사건은 마무리가 됐다.
위 사건에 대한 목소리 중에 이런 말도 있었다. "어찌 됐든 서로에게 금전적으로 이득이 되면 좋은 거 아닌가?"
오늘날 돈은 지불하고 차용하고 저축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다. 하지만 그와 함께 돈은 인간적 상호작용의 가장 좋은 부분인 사회적 관계를 없애버린다.
물론 돈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앞서 돈이 고려되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세계는 존재하고 심지어 더 나아보이기까지 한다(개발자 입장에서 오픈소스를 하는 사람은 정말 멋진 사람들로 보인다. 그래서 개발자라면 오픈소스에 참여하는 해보는 것이 하나의 목표처럼 되었다. 그로 인해 오픈소스 생태계는 계속 커지고 커뮤니티는 더욱 활성화된다. 과연 돈이 개입한다면 이런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할까?)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시장규칙이 우리 삶을 얼마나 잠식했는지, 고액 연봉을 받아 많이 벌고 많이 쓰자는 식의 삶만을 우리가 추구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보다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고 실천해보는 것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 또한 이 글을 마치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