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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ug 28. 2022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보이는 자에서 보는 자로

아시아단편 단편선1, <잘 지내고 싶지만> <드레스> <탑 중의 탑>

시선의 방향


그리스로마신화에 아르고스(Argos)라는 이름의 괴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몸에 붙어있는 100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다. 아르고스는 제우스의 애인인 이오를 감시하다 제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헤라는 그 100개의 눈을 공작의 깃털에 붙여준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은 뛰어난 감시자를 뜻한다. 판옵티콘의 감독자들은 죄수들의 모든 것을 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 있는 자들은 결코 위를 볼 수 없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항상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관음되던 여성이 고개를 들고 관찰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곧 비난으로 이어진다. 은밀하게, 자기들끼리 관음하고 관찰하는 '보는 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다 한순간에 '보이는 자'의 위치에 서버린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아시아단편 단편선은 아시아 여성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중 경쟁에서 선정된 작품들을 모아둔 섹션으로, 단편선 1부터 4까지 나뉘어 있다. 단편선 1에 속한 몇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들에서 여성은 더 이상 '보이는 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


잘 지내고 싶지만(Crack)(2021)

감독 : 이현주

상영시간 : 23분

시놉시스 : 25년 동안 혼자 살아온 민영은 함께 살게 된 조카 연정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연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잘 지내고 싶지만>의 민영과 연정을 보자. 민영은 연정이 오기 전 집을 깨끗이 닦고 연정을 맞을 준비를 한다. 연정의 약봉투를 세심히 살피고, 배탈이 난 연정을 위해 죽을 배달시켜 준다. 연정은 연정대로, 민영이 기침을 하자 쌍화탕을 먹어 보라고 권하고, 민영의 몫까지 삼겹살을 사온다. 민영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방도 한 칸뿐이지만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 주인으로서 객식구인 연정을 관찰하고 살핀다.


그러나 민영은 혼자 산 사람이다. 혼자 오래 살아온 사람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있다. 혼자 있으니 쓸쓸해서 누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 감정과 누구도 내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고 싶은 감정. 홍성은 감독의 <혼자 사는 사람들>(2021)에서 혼자 밥 먹고 혼자 TV보는 진아처럼, 민영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제가능한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영의 평화로운 삶에 조카 연정의 침입은 미세한 균열(Crack)을 만들어낸다. 호기롭게 '잘 지내보자'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 이제 민영의 집에는 연정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25년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의 눈. 그 눈으로 민영은 관찰당하기 시작한다.


아플 때 쌍화탕을 데워주었더라도, 밤에 시끄럽게 뭘 먹지 않았어도. 아침에 잠에서 깬 민영이 TV를 켰을 때 연정이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어도, 화장대 앞에 누워있는 연정의 다리를 치웠을 때 연정이 몸을 돌리지 않았어도 민영은 견디기 어려웠을 거다. 민영은 통제불가능한 연정의 눈을 피할 수 없다.


*


드레스(The Dress)(2022)

감독 : 스팡팅

상영시간 : 30분

시놉시스 : 리얼돌 호텔에서 일하는 원치는 어느 날 이상한 손님을 맞는다. 그는 매 방문마다 인형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 놓고 떠난다. 원치는 리얼돌이 되고픈 욕망을 난생처음 느끼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드레스>는 리얼돌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호텔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눈으로 호텔을 관음한다. 호텔 청소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호텔을 드나드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모른 척 해주는 사람이다. 사람일까? 어쩌면 NPC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다시 <프리 가이>의 가이를 소환해보자. NPC였던 가이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수상함을 깨닫고 세상 밖 현실의 진짜 사람과 소통하게 되면서 감정을 깨닫는다.


호텔이든 모텔이든 여관이든 묵을 일이 생기면 이따금 청소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내 눈에 보이는 자들이며 그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못본 척 한다에 가깝지만). 리얼돌 호텔을 찾는 자들 역시 자신은 볼 수 있지만 인형은 절대 자신을 볼 수 없으므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죽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히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

 

청소부 원치는 리얼돌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놓고 떠나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원치는 보는 자다. 섹스돌에 드레스를 입히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남자를 훔쳐보는 자. 그는 원치의 존재를 모르고 보여지는 자로 전복된다.


호텔에 전기가 끊겨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된 날, 원치는 그의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그가 이용할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기다린다. 그는 보는 자로 들어갔으나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이는 자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그는 호텔을 황급히 떠나야만 한다.


*


탑 중의 탑(The Top of the Tower)(2022)

감독 : 박은새

상영시간 : 22분

시놉시스 : 반지하에 살고 있는 지숙이네 가족. 어느 날 십자가에서 빛이 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빛을 다시 보기 위해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침수피해만 겪은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창문에다 대고 노상방뇨하고 구토하는 등의 일상적인 테러를 겪는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반지하 성범죄, 반지하 불법촬영 등의 뉴스기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권력을 가진다.


수험생인 지숙의 가족도 반지하에 산다. 지숙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갑자기 방에 걸어둔 십자가에서 빛이 나더니 천장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아! 드디어 성령을 본 것이다. 지숙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는 성령을 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간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신도는 성령이 십자가에서 빛나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이후 아들이 연금복권에 당첨되었단다.


하지만 지숙은 반지하에 산다. 목사가 이르기를,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야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텐데, 지숙네 가족은 너무 낮은 곳에 있다. 이들이 반지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지숙이 잘 되는 것이다. 지숙은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사실 택도 없지 싶다.


목사는 이 가족에게 옥탑방을 소개해준다. 엄마 아빠는 있는 돈 없는 돈, 친구 친척 사돈의 팔촌의 돈까지 끌어다가 무리하게 이사를 한다. 이삿짐 비용이라도 아껴보려고 세 가족이 죽도록 짐을 올린다. 이 집도 역시 엘베 없는 집이다.


마지막 매트리스만 올리면 이사도 끝인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지숙은 또 다시 성령을 목격한다. 지숙을 가여이 여긴 하나님의 은혜일까. 지숙은 성령의 빛을 따라 옥상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지숙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고층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폭죽이었다.


*


아시아단편 단편선1에는 위의 세 작품 외에도 <로봇이 아닙니다.>와 <거미>까지 총 다섯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거미>는 에도시대에 강도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는 여자 이야기이고, <로봇이 아닙니다.>는 자율주행자동차가 백인이 아닌 여성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고를 다룬다. 서두의 아르고스 이야기는 <로봇이 아닙니다.>에서 가지고 왔다. 연구에서 과소대표되고 비표준화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묶어보기로 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시아단편 단편선1을 상영하던 날, 영화제 현장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아마 동시간에 나와 함께 영화관에 있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제법 큰소리였다. 양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짓을 몇십 분은 한 것 같은데(하필 나는 그 남자 근처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당하게 성기를 흔들고, 놀란 여성들을 보는 자로 군림하고 싶었겠으나 딱하게도 현장에서 그는 보이는 자, 아무리 봐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도 대꾸해주지 않는 자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 창문 열고 따라오며 똑같은 짓을 하던 성인 남성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던 교복 입은 어린 여자 아이도, 그런 사람을 보니 딱하더라는 글을 쓰는 어른 여자가 되기도 한다.


*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14:00~15:4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년 8월 29일 16:30~18:1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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