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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pr 20. 2021

[왓챠 영화] 그린 북

스포가 있습니다.


*


차별의 역사는 유구하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차별없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무언가를 착취해야만 살아남는 유약한 개체인지도 모른다. 긴 시간 동안 백인은 흑인을, 동북아시아는 동남아시아를, 남자는 여자를,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해왔다.


얼마 전 미국에서 아시안혐오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그 전에는 Black Lives Metter 운동이 있었고, 흑인들이 한인에 대한 무차별 폭행이 벌어졌다. 우리나라는 다인종국가가 아니라서 체감되지 않으나 전세계 온갖 인종이 다 섞인 멜팅팟 미국에서는 심심찮게 인종차별 문제가 발생한다. 


디트로이트에서 블루칼라, 저소득, 저학력 백인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다. 산업혁명으로 유래없던 번영을 누리던 러스트벨트(Rust belt) 지역은 자동차업계의 파산과 자유무역 등으로 피폐해졌다. 트럼프는 그들에게 미국제일주의(아마도 미국에 사는 백인 남성 제일주의가 아닐까)를 내세웠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들에게 유색인종들의 문제 따위가 중요할 리 없다. 지금까지의 차별로 인해 사회적 보호망을 극히 일부 가지고 있던 유색인종을 향해 "이것은 역차별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차별없는 세상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다. 나는 여성이므로 여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백인 남성 다음이 흑인 남성, 그리고 백인여성 또는 아시아 남성, 다음이 아시아 여성의 위치일 것이다. 이는 내 나름 미국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순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시안 여성인 내가 백인 흑인 남성이 차별과 맞서 싸우는 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게 우습다.


출처: 네이버 영화


나이트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을 처리하는 해결사인 토니 발레롱가는 문제가 생기면 시원하게 패서 해결하는 그런 인물이다. 토니는 나이트가 영업정지되면서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어려워진다. 그러던 중에 일자리를 제안받는데, 피아니스트 닥터 셜리의 수행비서쯤 되는 일이다. 돈 앞에서 뭐가 중요하겠냐만, 흑인 밑에서 일하는 게 영 떨떠름하다.


셜리는 러시아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천재 피아니스트이지만, 흑인이 클래식을 하면 설 자리가 없을 게 분명하여 백인들이 좋아하는 재즈를 연주한다. 그의 집은 카네기홀 꼭대기층. 온갖 고급품으로 둘러싸인 성 같은 곳이다. 화려한 복장과 왕좌 같은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은 1960년대 흑인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결국 토니는 셜리의 남부 투어 기사직을 수락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 권의 책을 받는다. <Nigro motorist Green book>이다. 흑인 여행자가 투숙할 수 있는 호텔, 입장 가능한 식당 등이 기록되어 있다. 차별받지 않은 자는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른다. 이탈리아계이긴 하지만 백인 남성인 토니는 그 책이 왜 필요한지 모른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토니와 시종일관 엄중한 태도의 셜리는 여행길 내내 부딪친다. 토니는 애초에 연주회 같은 것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사람이라, 연주회에서의 태도도 불량하다. 서로 불만이 많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 많다. '서로에게'라기 보다 셜리에게 토니가 필요하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아니면 연주하지 않는 셜리에게 낡고 더러운 피아노를 준비해놓은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피아노를 바꿔놓고, 바에서 셜리를 모욕하는 놈들을 패준다. 셜리는 연주자이지만 화장실도 쓸 수 없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도 없어도 받아들인다. 불같은 토니는 항상 감정을 자제하고 드러내지 않는 셜리를 보고 감탄한다. 게다가 토니는 한국인도 아니면서 아내에게 쓰는 편지에 Hi, How are you? 같은 거나 쓰지만, 셜리가 로맨틱한 편지를 쓰도록 도와준다. 토니가 받은 도움은 이 정도겠다.


켄터키주를 지나가면서 켄터키치킨을 먹는 장면은 무척 인상깊다. 그 전까지 셜리는 절제되고 간소한 식사만 했고, 토니는 어마어마하게 먹어댔다. 토니는 치킨을 끝까지 먹지 않겠다는 셜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셜리는 처음 먹는 치킨의 맛에 눈을 뜬다. 닭고기는 흑인 노예들에게 먹이던 싼 고기였다.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내재된 공포를 확인할 수 있다. 차가 고장나서 잠시 멈추었을 때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들과 백인 기사를 대동한 셜리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


남자와 동침하다 경찰서에 잡힌 셜리가 풀려나도록 도와주는 토니. 빗속에서 흑인 통행금지시간이라며 차별적 처사를 하는 경찰을 패버리고는 유치장에 구금된다. 겨우 전화 한 통을 할 권리를 찾은 셜리는 어딘가로 전화하고, 그 전화로 인해 경찰서는 사색이 된다. 셜리가 전화한 사람은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바비 케네디.


경찰서에서 풀려났지만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셜리는 기뻐하는 토니에게 화를 낸다. 자기는 평생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아왔는데 한 번을 못 참냐며. 토니도 응수한다. 거리의 삶을 사는 자신이 더 흑인 같다고. 그 말에 차에서 뛰쳐 나가는 셜리. 토니에게 그간 쌓여온 울분을 토한다. 백인들의 돈으로 먹고 살고, 흑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자신은 대체 무엇이냐며 소리치는 셜리는 낯설다. 아마 셜리는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공연. 대기실이라고 주는 곳이 창고인데다 옷을 갈아입고 온 셜리의 입장까지 저지하는 곳이다. 셜리가 흑인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하나로. 또 지배인을 팰 준비하는 토니에게 셜리는 괜찮다고 하지만, 결국 그 재수없는 곳을 박차고 나와 흑인들의 클럽으로 간다. 


토니가 바텐더에게 완전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고 입을 털자, 한번 해보라는 바텐더. 낡고 형편없는 피아노인데다 위에 술까지 올려져 있지만, 셜리는 피아노 위의 술만 내려놓고 연주를 시작한다. 쇼팽 에뛰드 <겨울 바람>이다. 흑인들 앞에서야 비로소 클래식을 연주하는 셜리. 자유로워 보인다. 


투어를 마치고 두 사람은 뉴욕으로 돌아간다. 또 다시 경찰이 그들을 막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뒷바퀴가 펑크났다며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남긴다. 도로에 폭설이 쏟아진다. 아픈 토니 대신 셜리가 뉴욕까지 운전해 집에 내려준다. 토니는 크리스마스 파티 중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셜리는 자신만의 외로운 궁전으로 돌아간다.


기쁜 날일수록 외로운 자들은 더 외롭다. 셜리도 그렇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토니를 찾아간다. 백인들의 짧은 침묵, 그리고 뜨거운 환영. 말 그대로 메리 크리스마스다. 


*


영화 <헬프>에서 흑인 하녀들을 도와주는 백인처럼 이 영화도 백인 구원자 서사가 있다. 차별 받는 대상에 대한 서사에는 꼭 차별하는 쪽, 그러니까 권력을 쥔 쪽의 시혜적 시선이 포함된다. 구원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영웅에 열광하기 때문에 차별받는 쪽보다 구원하는 쪽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라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자력으로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우면 더욱 좋겠지만 약자에게 언제부터 그런 힘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약자와 강자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사람은 폭력과 차별에 눈 감는 방조자다. '나는 중립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약자에도, 강자의 폭력에도 방관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말 차별은 옛날에나 있었지, 지금은 없는 일인가.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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