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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Jul 30. 2021

[넷플릭스 영화] 색, 계

* 스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보고 보고 또 본다. <색, 계>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화끈한 정사씬은 차치하고, OST며 분위기며 탕웨이며 양조위며, 여러 번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비가 아주 많이 오면 <색, 계>를 보고 싶다. 그런 게 있지 않나. 날씨에 따라서 보고 싶은 영화. 며칠 전 장마 끝무렵 어느 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던 날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그 시절의 애인이랑 같이 봤는데,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 도대체 뭘 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아마 눈을 질끈 감았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눈 한번 깜빡거릴 틈도 없겠지만.


<색, 계>를 보고 왔다고 하자 사람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둘이 봤다고?" 하는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냥 생각이라는 게 없던 20대 초반이었다. 영화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자극적인지만 중요했던 때. 이 영화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치 포르노처럼 알려졌다.


세월이 흘러서, 20대 중후반이 되었을 때 이 영화를 다시 봤다. 혼자서 봤는데, 그제야 비로소 이 영화에서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시 보았을 때는 화가 조금 났고, 또 보았을 때는 조금 허무해졌다. 


출처: 네이버 영화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다. 배경은 상하이와 홍콩. 

친일파 이 대장을 제거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 상하이의 한 카페에서 막부인이 커피를 마시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중일전쟁 이후 사람들은 홍콩으로 피난을 갔다. 왕치아즈도 그 중 하나다. 영국에 있는 아버지는 곧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하지만, 실낱같은 기대 속에서도 불가능하리라는 걸 짐작한다. 상하이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 홍콩의 대학에 다니게 된 왕치아즈는 선배 광위민의 권유에 애국 연극단에 가입한다. 


왕치아즈는 연극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극이 끝난 뒤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버스에 올라타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대학생의 모습이다. 청춘이라는 식상한 단어가 딱 어울린다.


그 사이, 일본 괴뢰정부의 방첩기관장 이 대장이 홍콩으로 오면서 이 청춘들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필이면 광위민의 선배가 이 대장의 비서로 고용된다. 광위민은 이 대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연극반으로 간 왕치아즈는 무대 위에 서 있다. 다른 연극단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무대에 홀로 선 왕치아즈는 연극을 할 때의 감흥을 다시 느끼는 듯하다. 그때 2층 관객석에서 친구들이 왕치아즈를 부른다. 왕치아즈가 2층으로 올라가자, 광위민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애국을 할 기회에 대해 말한다.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이 접근 방법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왕치아즈와 다른 한 명을 사업하는 막부부로 연출하여, 이 대장에게 접근하는 거다. 말 그대로 미인계를 쓰는 건데, 왕치아즈는 성경험이 없었기에 연극단원 중 성경험이 있는 단 한 명, 그것도 성매매 경험이 있는 놈과 연습을 한다. 나중에는 '늘었다'며 칭찬까지 하는 이 놈에 비해 왕치아즈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있다. 다른 단원들은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만 한다.


아무튼 막부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왕치아즈. 일본 괴뢰정부에서 한 자리씩 하는 부인들의 모임에 끼어 마작을 한다. 마작으로 맨날 돈을 잃지만, 이 대장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왕치아즈가 막부인 연기를 하는 동안 친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왕치아즈는 집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하여 그들과 말도 섞지 않는다. 


그러다 이 대장의 양복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 대장 부인의 말에 막부인은 자기가 잘 아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이 대장과 함께 양장점에 가게 된 막부인. 처음으로 그와 둘만의 식사를 한다. 이 대장의 눈빛도, 막부인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다. 이 대장은 현관 앞까지 막부인을 데려다 준다. 차 한잔 하고 가시라는 말에도 그냥 돌아간다. 이 대장은 삼엄하게 주위를 경계한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 사이 안에서는 이 대장을 총으로 쏘기 위해 연극단원들이 우당탕탕 난리도 아니다. 이 대장은 가고, 그들은 허무해한다. 얼마 뒤 이 대장이 상하이로 다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연극단원도 짐을 싼다. 처참한 실패다. 애송이들이니까. 열정 외에는 아무것도 세팅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광위민의 선배가 눈치를 채고, 그들을 찾아온다. 격렬한 몸싸움 끝에 선배는 칼에 찔려 죽는다. 연극단원들은 그것을 '조국을 배신한 대가'라고 한다.


청춘들의 어설픈 민족 반일 운동은 그렇게 끝이 나고, 상하이로 돌아온 왕치아즈는 대학을 다니며 평범하게 살아간다. 영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러던 중 상하이에서 여전히 항일운동을 하고 있던 광위민과 마주친다. 광위민은 아직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며 왕치아즈를 끌어들여 상부에서 일하는 우영감에게 데리고 간다. 우영감은 왕치아즈가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했던 편지를 불에 태운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부는 광위민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다시 막부인이 된 왕치아즈. 이 부인의 집에 잠시 기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대장은 흔들린다. 별장에 막부인을 데려다 놓고, 옷을 찢고 벨트로 때리는 등 아주 거칠게, 사디스트적으로 대한다. 이 대장의 극도로 치닫은 경계심과 불안이 나타나는 장면이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고, 일본 패망의 조짐이 조금씩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는 상대를 완전히 지배하고 나서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우영감은 왕치아즈가 이 대장을 죽일 것을 바라나 광위민은 전문 스파이도 아닌 왕치아즈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항의한다. 둘 사이 언쟁이 조금 있다가, 왕치아즈는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뱀처럼 파고든다고, 연기를 할 수도 없다고. 사로잡히는 건 이 대장 쪽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그리고 이 대장의 심부름. 봉투를 주며 배달을 하라고 한다. 왕치아즈는 우 영감에게 봉투를 가지고 간다. 기밀문서인 줄 알고 열어보았지만 단순한 명함이다. 이 대장이 부탁한 배송지는 보석상이었고, 거기서 제일 좋은 다이아반지를 하나 맞춘다. 그러니까 서프라이즈 이벤트. 


반지를 찾으러 가는 날, 왕치아즈는 동료들에게 때가 되었음을 알린다. 반지를 끼자마자 바로 빼려는 막부인의 손을 어루잡으며 이 대장은 이걸 낀 모습이 보고싶었다고 한다. 강도라도 당하면 어떡하냐는 물음에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막부인의 눈빛이 흔들린다. 지금 도망가라고 그에게 속삭인다. 눈치 챈 이 대장은 엄청난 속력으로 도망가고, 연극단원들은 모두 붙잡힌다. 연극단원들은 결국 채석장에서 총살을 당한다. 그때의 눈빛들. 왕치아즈를 원망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왕치아즈의 눈은 공허하기만 하다. 막부인이 돌려준 반지를 보고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대장. 막부인이 머물렀던 방을 둘러보며 영화는 끝난다.


*


집단은 이기적으로 변하기 쉽다. 왕치아즈가 막부인 연기를 하는 동안, 나머지는 도대체 무엇을 했나. 왕치아즈가 원하지 않는 상대와 첫경험을 해야 하고, 또 언제든 정체를 들킬 수 있는 상황에 매일 직면하는 동안 그의 동료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영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치 왕치아즈 혼자 무대에 선 것을 관람하는 2층의 관람자들처럼 막부인이 이 대장에게 접근하고, 그를 유혹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왕치아즈는 소속집단을 배신했다. 크게 보았을 때 민족을 배신한 것과도 같다. 괴뢰정부의 대장을 살려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누가 왕치아즈를 욕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도구로 이용해서 하는 애국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연극단원들은 왕치아즈를 앞세워 대리만족을 했을 뿐이다. 내가 지금 조국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비겁함. 영화 초반, 연극단원의 연극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치고, 금일봉까지 내미는 그들과 다를 바 없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상황에서 등장한다. 파시즘이 그렇고, 독재국가가 그렇고, 비겁한 집단에서 그렇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한 사람을 다른 한 사람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만약 이들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조국과 애국연극단의 기쁨과 희열 뒤에 차마 겉으로 티도 내지 못했을 왕치아즈의 슬픔은, 과연 누가 알아주었을까.


언젠가 또 비가 쏟아지는 밤, 아마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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