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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ug 17. 2021

<노팅힐>, 용기없는 자의 판타지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에서 보세요

스포가 있습니다.


*


친구가 런던으로 여행을 다녀와서 노팅힐 에코백을 사다줬었다. 노팅힐 북샵이 여행명소라고 했다. 그만큼 이 영화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노팅힐>은 너무 유명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몇 번이고 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1999년, 세기말에 나온 이 영화를 2021년에 처음 봤다. 20년 전의 사랑 이야기다.


로맨스 영화를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점에서 로맨스는 여느 액션, SF 등에 맞먹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는 취향은 살짝 평가절하되기 쉽다. 아무래도 신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인류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주제 덕분에 내용이 허술한 작품도 많다. 로맨스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수많은 작품들이 로맨스로 분류되기도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러브라인이 생기는 영화보다야 그냥 대놓고 사랑 얘길 하겠소, 나는 지금부터 당신을 울려 보겠소, 하는 쪽이 낫지 않은가.


<노팅힐>은 아마 2003년에 나온 <러브 액츄얼리>처럼, 한때는 누군가의 인생영화 목록에 기록되어 있다가 이제는 지워졌을 법한 영화다.


출처: 네이버 영화


노팅힐에서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 새커는 아내가 바람이 난 바람에 혼자 책방을 운영하며 지내는 이혼남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책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커피도 반 잔만 먹어야겠다고 할 정도로 적자에 허덕인다. 그나마 아내와 같이 파란색 문의 집을 사두어서 다행이다.


그의 가게에 세계적인 톱스타 '애너 스콧'이 찾아온다. 사실 여기서부터도 판타지다. 그런 톱스타가 매니저도 없이 혼자서 작은 가게를 찾아온다니. 아무튼 터키 여행책을 별안간 구입한다.

애써 담담한 척 하던 윌리엄 새커는 애너 스콧이 가게에서 나간 뒤에 커피를 리필하러 다녀오다가 또 별안간 그녀와 마주쳐 옷에 커피를 쏟는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자기 집에 가서 옷을 씻자는 말에, 애너는 그의 집으로 간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애너에게 차를 마실래, 간식을 먹을래, 꿀에 절인 살구를 먹을래,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하는 윌리엄. 다 됐다고 하고 집을 나서던 애너는 정말 별안간에 그에게 키스를 한다.


"비현실적이지만 좋았어요."


윌리엄은 현관에 서서 애너에게 말한다. 말해놓고 후회한다. 이 대사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감정이다. 비현실적이지만 좋은. 그래서 어찌 할 바도 모르는.


이 비현실적이지만 좋은 기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윌리엄은 애너에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만약 애너에게 전화가 온다면 비현실은 즉시 현실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사흘이 흘러도 전화는 오지 않고, 현생을 살려고 하던 윌리엄에게 그의 룸메이트 스파이크가 말한다. 전화가 왔는데 리츠에 있고 이름은 어쩌고저쩌고.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찾아간 곳에는 이미 수많은 기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윌리엄은 어디 소속이냐는 물음에 호텔에 놓여있던 잡지 <승마와 애견> 소속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겨우겨우 애너와 이야기할 시간을 가진 윌리엄. 용기 내어 저녁에 바쁘냐고 묻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여동생의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던 것. 애너는 거기에 같이 가겠다고 하는데, 처음 본 남자의 친동생 생일 파티에 우주대스타가 가겠다고 하는 상황도 당황스럽다.


생일 파티 현장에는 전형적인, 삶에 조금씩 결함이 있지만 나름대로 소박하게 행복한 서민들이 등장한다. 애너는 그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이지만, 윌리엄의 친구들도 애너를 배려하여 너무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장 불쌍한 사람에게 브라우니를 주는 이벤트에 애너도 참여한다. 애너는 그들의 삶에 편입되고 싶어한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로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하는 벨라,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버니, 이혼하고 혼자 사는 윌리엄, 서로 자기의 불행을 대결하는데 애너는 자기도 이 불행배틀에 끼고 싶다. 다양한 불행과 위로가 공존하는 장(場)이 인생이니까.


어쩌면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어야 하고, 조금의 흠도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키기에 숨 한번 편히 못 쉬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불행과 허물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이들이 부러울 수도 있겠다. 역시나 '비현실적이지만 좋은' 풍경이다.


파티가 끝나고, 윌리엄과 애너는 밤산책을 한다. 작은 공원을 공유하는 빌라들을 지나가다, 애너는 공원의 모습을 궁금해한다.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작고 소박한 공간. 윌리엄은 담을 넘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되고, 애너는 한번에 훅 넘어간다. 용기 없는 자여.


애너의 호텔 앞. 같이 올라가자는 애너의 말에 큰 용기 내어서 따라간 윌리엄. 하필이면 애너의 남자친구가 호텔에 와 있고, 그는 룸서비스인 척 하면서 나간다. 애초에 넘보지도 못할 상대였다. 용기 없는 자여.


애너를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윌리엄의 집 초인종이 또 울린다. 역시 애너다.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찍은 비디오가 문제가 되었는데, 숨을 곳이 없단다.

참 그 시절엔 우리나라에서도 여자 연예인들의 그런 비디오들이 폭로되곤 했다. 한 인간의 존엄을 박살내는 것이 왜 이리도 쉬운지 모르겠다. 지가 좋아서 찍어놓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다행이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발생한다. 그 역은 대부분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부터 경제대공황 이전까지 찍어내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건 예외로 하자.


윌리엄과 함께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는 애너. 다음날 아침까지 분위기 좋다가 초인종 소리에 팬티 바람으로 나간 윌리엄의 앞에 수많은 기자들의 플래시가 쏟아진다. 애너는 굳이 또 현관문을 열어본다. 톱스타치고는 참으로 조심성이 없다. 그렇게 또 카메라 세례를 받은 애너는 윌리엄에게 분노를 퍼붓는다. 이 상황에 대한 전위이기도 하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윌리엄의 공감이 부족한 탓이다.


당황하는 애너에게 어차피 사람들은 다 잊을 거라는, 오늘이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말만 반복한다. 당연히 윌리엄을 아는 사람은 없고, 애너처럼 모두가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 본 적도 없으니까 애너가 어떤 심경일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윌리엄은 늘 애너를 생각한다. 고작 두어 번 만났을 뿐이지만. 왜 운명이라고 생각했을까? 애너가 슈퍼스타라서? 아니면 애너가 먼저 키스해서? 그것도 아니면, 정말 느낌적인 느낌이었을까. 운명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애너가 런던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알고 윌리엄은 애너를 찾아간다. 약속도 없이.  하필이면 또 애너는 말이 나오는 영화를 촬영하네. 윌리엄이 지나가는 말로 좋다고 했던 작가의 작품으로. 거기서 우연히 애너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그냥 친구, 별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걸 듣게 된다. 또 혼자 상처받은 윌리엄. 그런 윌리엄에게 또 먼저 찾아오는 애너.


"내가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지금은 소년에게 사랑을 구하는 소녀에 불과해요."


이런 대사를 2021년에는 하지 않겠지. 네가 너무 유명해서 부담스럽다는 남자에게,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면서 사랑을 구걸하는 여자라니. 그 와중에 윌리엄은 또 애너를 거절한다.


윌리엄은 애너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애너가 자기보다 대단한 사람이니까. 애초에 넘볼 사람도 아니었지만, 어떤 노력을 했는가. 친구가 애너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는 걸 막길 했나, 먼저 고백을 하길 했나. 애너의 괴로움에 대해 공감을 해주었나. 용기라고는 한톨도 없다.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직접 보는 게 좋겠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윌리엄이 용기를 내니까.


*


가만히 있어도 세계 최고의 미녀가 먼저 접근하고, 키스하고, 고백하고, 결혼하는. 우리의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연예인을 보며 했던 망상들을 이룬 사람이 윌리엄 새커다. 운명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까. 그러기엔 애너 혼자 짊어져야 할 짐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윌리엄이 그 모든 걸 운명이라고 여겼다면, 그 운명은 애너가 닦아놓은 길을 걸어간 것뿐이다.


보통 '운명적'이라고 하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들을 말하기 쉽다.

사랑이 그런 거라면 나는 사랑 안 하고 싶은데, 또 모르지. 그런 사랑이 나타나면 '운명'이라며 불나방처럼 달려들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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