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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ug 19. 2021

<박강아름 결혼하다>, 박강아름의 내밀한 삶

그집 남편 참 괜찮네요...

결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 이미지들은 아마도 성장과정에 가정에서 보고 배운 바를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첫문장은 아직까지도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톨스토이가 이 책을 쓰던 1800년대에도, 지금까지도 수많은 가정이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현세대의 결혼기피현상을 집값으로 뭉뚱그려 보는 사람이 많다. 정말 돈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걸까? 남성의 입장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동물들도 수컷이 둥지도 없이 암컷에게 구애하지는 않을 테니까.


반면 여성의 경우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결혼적령기 여성들은 부조리한  가정 상황을 목도하며 자라왔고, 그것이 내 일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비혼을 말한다. 나도 그런 쪽이다.


이를테면 맞벌이를 하지만 요리청소빨래 집안대소사 모든 것을 감당하는 엄마와, 새벽 5시에 엄마가 일어나서 차려준 밥을 먹고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엄마가 차린 저녁 먹고 TV에 나오는 외화를 보다가 술 한잔 하고 자는 아빠. 그걸 다 치우고 녹초가 되어 잠든 엄마.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느라 집에 안 오는 아빠. 친구도 없는 엄마. 그리하여 온몸의 관절에 관절염이 왔으나 아직도 일하는 엄마와 단지 술로 인해 병든 것 외엔 건강한 아빠.


나는 결코 엄마의 삶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구한 차별의 역사쯤이야 일이 년만에도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악습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전복시켜버린 여자가 있다. 이름은 박강아름.




#역할전복


박강아름은 진보당 활동을 하던 정성만을 만나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먼저 결혼하자고 하고, 공부를 해야겠으니 프랑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이미 결혼을 해버렸으니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비혼주의자였던 정성만은 한국에서 요리보조로 일하며 소설을 쓰던 사람이었다. 박강아름과 달리 프랑스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박강아름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를 낳았다. 프랑스에서의 출산과정은 지난했다. 커뮤니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도와줄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박강아름은 모든 걸 감내한다. 어차피 아이를 낳는 건 본인 몫이니까.



그렇다. 아이를 낳는 건 여자의 몫이다. 토하고, 쓰러지고, 입원하고, 뼈와 근육이 제멋대로 놀고, 출산 후 손목 통증이 가시질 않고. 젖을 물리는 내내 젖꼭지에 피가 난다. 그러므로 출산에 관한 선택은 여자의 것이어야 한다.


정성만은 무엇을 하는가 하니, 살림을 한다. 박강아름의 표현에 따르면 '독박살림 독박육아'다.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아이를 돌보고, 놀아주는 모든 역할을 정성만이 한다. 박강아름이 학교에 다니고 작업을 하는 동안 정성만은 박강아름의 보조, 정성만의 표현에 따르면 '식모'다.


어디서 많이 본 시나리오가 아닌가.

남편을 따라 연고도 없는 곳에 가서 아이를 낳고, 밥을 짓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놀아주고, '식모' 같다고 느끼는 삶. 가부장제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요새 맞벌이 안 하는 여자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돈도 벌고, 애도 키우고, 집안일도 하고. 결혼 전과 돈 버는 건 같은데 노동의 양은 몇 배로 증가한다. 또는 수 년간 쌓아온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내, 엄마로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러려고 공부하고 일한 건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 사람들은 웃는다.

성만이 살림할 때, 본인을 '식모'라고 부를 때, 살림의 고달픔을 토로할 때, 혼자 김장을 하면서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말을 걸 때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과연 그 반대였더라면 웃음 포인트가 되었을까? 그저 일상적인 풍경을 보면서 웃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재능있는 여자들이 예술가 남편을 뒷바라지 하느라 재능을 갖다 버리는 걸 수도 없이 보고 듣고 겪었다.



#외길식당


이들 부부는 프랑스에 와서 자아가 없어진 성만을 위해 가정집 원테이블 식당을 열기로 한다. 원래도 요리를 잘했던 터라, 성만은 내심 기뻐 보인다. 부부의 식당에는 가난한 유학생, 집밥을 그리워 하는 유학생들이 찾아온다. 그릇을 사고, 좋은 재료를 고르는 성만의 표정이 밝다.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는 사람은 고립되기 마련이다. 성만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름 뿐. 뜨겁게 사랑하다 보면 세상에 너랑 나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없을 거라고 말하게 되지만, 실제로 세상에 단둘이 남겨지면 미쳐버릴지 모른다.


고립되어 가던 성만은 외길식당을 차린 후에, 한식부터 일식, 중식, 양식까지 뚝딱 만들어내며 자신의 쓸모를 다 한다. 하지만 집안 살림에 식당 영업까지, 아름은 작업에다 손님 대응까지 하려니 힘에 부친다. 결국 외길식당은 문을 닫고, 이사를 몇 번 다닌 후에야 다시 문을 연다.



이유는 역시나 그들의 고립 때문이다. 고립된 채 서로에게만 의지하는 부부에게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넌 이런 부분이 이기적이야, 너는 늘 이기적이야. 그래서 아름은 다른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외길식당2에 다녀간 여러 형태의 커플들. 그들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고민들을 안고 산다. 결국 아름은 외길식당2에서도 답을 얻지 못한다.



#덩케르크


누릴 수 있는 사치라고는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것이 전부인 그들. 아름은 영화제작 기금을 받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그런 그들도 여행이라는 걸 떠난다. 덩케르크 해변으로 가는 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성만은 왜 비오는 날 바다에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아름은 바다에서 찍고 싶기 때문에 가는 거라고 한다.


이들 부부의 주도권은 대부분 아름에게 있다. 성만은 투덜대지만 어쨌든 간다. 해변에 도착하자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날은 잔뜩 흐려 옥빛 바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모래사장으로 유모차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결국 성만이 앞에서 지고, 아름이 뒤에서 들고 바다 앞까지 간다.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에서는 전쟁 상황과 대비하여 바다가 너무 예뻤다. 영화관에 앉아서도 그 대사를 떠올렸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조국(Home)."


<덩케르크>를 볼 때도 그 부분에서 속으로 으악... 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던 기억이 난다. 덩케르크 씬은 마치 조국 그 자체, 프랑스에 있어도 부부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성만 같은 남편이 있다면 한번쯤 결혼을 해봄직도 하다.


어쩌면, 행복한 가정의 서로 닮았은 모습이 박강아름과 정성만, 정보리강 가족에게서 보였던 것 같다.



*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박강아름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보니, 한편으로는 홈비디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애니메이션과 가수 이랑의 노래가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서두에서 박강아름 감독은 개인의 이야기가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옥랑문화상 수상 및 국내외의 여러 영화제에 초청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로 개인의 이야기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2020년 한 작가의 오토픽션(자전적 소설)이 문단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카톡으로 나눈 대화의 전문을 작품에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 조근식 감독이 <품행제로>를 촬영할 때 1980년대 본인이 살았던 동네의 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작품이 되느냐, 한 개인의 일기장이 되느냐는 개인적 관점이 전체를 관통할 때가 아닐까.


처음에는 '도대체 이건 뭘까' 싶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는 이런 관점과 용기와 행동력을 가진 여성들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작에서도 이미 여성의 몸에 관해 할 수 있는 말들을 다 했던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보고 듣기 쉽지 않았던 여성의 자궁과 질, 출산과 모유수유, 예쁘게 꾸미지 않은 여성의 몸을 여성이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직면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현 시점에서 박강아름 감독은 응당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는 남자 주인공 다미앵은 어느날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성중심사회로 간 이야기다. 물론 이 영화는 픽션이다. 그러나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리얼리티다.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 시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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