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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Sep 15. 2021

끝없이 실패하는 사랑에 관하여

영화 <토베 얀손> 리뷰

스포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실패할 것이 눈에 뻔히 보여도,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지라도 일단 덤벼들고 보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 앞에 주춤할 수 있는가. 계산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토베 얀손은 우리에게는 무민 원작자(또는 무민 엄마)로 알려졌다. 핀란드 국민 캐릭터 무민을 만든 사람. 어쩌면 그냥 거기까지. 조앤 K. 롤링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썼다, 같은 느낌이다. 무민에 대한 이야기는 책, 애니메이션, 전시 등 다양하다. 하지만 무민을 만든 사람이 대관절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다. 토베 얀손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영화 <토베 얀손>은 그런 점에서 작가론적 영화다.


토베는 조각가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 의기소침한 화가이다. 캔버스를 흰색 물감으로 뒤덮으며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부르는 화가. 토베의 아버지는 토베가 하는 것마다, 그리고 실패할 때마다 '그러게 내 말을 들으라고 했지?' 같은 말만 한다. 토베는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음에 좌절한다. 아버지는 토베가 그리는 무민 캐릭터에도 그런 식이다. '이런 건 그림이 아니야' 




아버지는 토베의 <담배 피우는 여자> 그림을 안 보이게 돌려놓는다. 그러나 토베는 숨쉬듯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다. 아버지는 또한 국가이자 제도이자 관습이자, 그 모든 규범의 상징이다. 아버지를 거역하는, 아니 거역해야만 예술가가 될 것이다. 


토베가 그린 그림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낙서처럼 그린 무민으로 만든 풍자만화가 조금씩 주목받는다. 그래도 수입은 불규칙하다. 토베는 예술가가 아니면 동정 뿐인 집안에서, 천재 아버지의 오점을 맡고 있다. 예술가 모임에서 만난 유부남 아토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와 결혼할 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토베의 <담배 피우는 여자>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그 사람은 토베의 심장을 강타한다. 바로 비비카.



비비카는 시장의 딸이자 연출가이다. 시장의 고희연 초대장 삽화를 의뢰하면서 인연이 되었다. 토베는 거절할 수 없는 강한 끌림에 비비카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떡하나. 비비카는 아무나 사랑한다. 혹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결혼을 했지만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토베만 바라보지도 않는다. 끝없이 다른 이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토베는 비비카의 부탁 반 강요 반으로 무민의 연극 각본을 쓰게 된다. 하기 싫지만 사랑하니까 한다. 그래도 다행히 무민 연극이 히트를 치면서, 토베는 꽤 유명한 작가가 된다. 화가는 아니고, 동화작가다. 



누군가가 묻는다. 왜 동화를 쓰게 되었냐고.

토베는 대답한다. 화가로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비비카를 사랑하지만 비비카는 이기적이다. 비비카에 대한 사랑은 영영 실패한다. 파리에서 우연히 비비카를 만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토베에게 비비카는 '나는 파리를 사랑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다. 


아토스는 토베와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까지 불사한다. 토베 역시 비비카에 대한 좌절감으로 청혼을 승낙하지만, 결국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아토스 역시 토베와의 사랑에서 실패했다. 아무리 무뎌지려고 해도 안 되는 마음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무민의 인기는 고공행진한다. 당시 세계적인 일간지였던 <이브닝뉴스>에서 토베와 계약을 하는데, 그 기간이 무려 7년이다. 월급인 줄 알았던 금액은 주급이다. 집세도 못내서 전전긍긍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인기작가가 되었다.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까지를 다룬다. 아버지가 죽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신문에 연재한, 혹은 인터뷰한 무민과 토베의 모든 것을 모아둔 스크랩북을 발견한다.


그리고 토베는 별안간 치워두었던 물감과 캔버스를 꺼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으니, 토베의 평생 반려자인 툴리키다. 툴리키는 무엇을 그리느냐고 묻는다. 


토베는 말한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


*


영화는 무민의 탄생 배경이라든지 토베가 무민으로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등을 완전히 배제한다. 영화 안에는 예술가이자 여성인 토베 얀손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고독, 그의 외로움, 우울이 펼쳐내는 행위들만 존재한다.  


토베 얀손은 무민을 그리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인자한 할머니 이전에 시대와 관습에 저항하며 치열하게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던 한 명의 예술가였다. 또한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간 한 명의 여성이었다. 이 영화의 감독 또한 여성인데, 한 인간에 대한 전기적 영화임에도 그의 연대기, 혹은 그의 위대함을 작위적으로 꾸미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기적 영화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토베는 화가가 되는 데도 실패하고 비비카와의 사랑도 실패했으나, 실패는 실패대로 의미가 있다. 끝없이 실패해도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 무민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음에도 다시 붓과 물감을 잡는 토베 얀손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늘 우리를 아프게 한다. 돈을 사랑하면 돈이 당신을 아프게 할 것이고,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당신을 아프게 할 것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 때문에 몇 리터의 눈물을 쏟았을 터다. 사람을 사랑할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반드시 그것 때문에 울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장정일의 시,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처럼, 사랑을 끄고 켤 수 없기 때문이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사랑한다. 어쨌든 삶을 굴려가는 건 사랑이다. 실패하거나 말거나, 사랑이 우리를 죽이고 살린다. 



* 시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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