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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제국이 이끄는 신용사회

'쿠팡 나중결제'로 사고, '쿠팡이츠'로 갚는 삶

by 델리완쥬

여느 날과 다름없이 쿠팡에서 장을 보다가 결제 창에서 '나중결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결제를 후불결제의 일종으로만 생각하셨던 분들이라면 의아하시겠지만, 저는 나중결제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야흐로 쿠팡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이죠.


쿠팡 결제 단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나중결제'입니다.


나중결제 = 3無(연회비, 할부이자, 신용등급 심사) 후불결제

우선 나중결제가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 볼까요? 나중결제는 '3無 후불결제'입니다. 여기서 3無는 연회비, 할부이자, 신용등급 심사를 가리킵니다. 무엇보다도 신용등급 심사가 없다보니, 불안정한 소득이나 낮은 신용등급으로 인해 신용카드 발급이 어려웠던 사회 초년생∙주부∙프리랜서∙씬 파일러(thin-filer)와 같은 금융 소외 계층이 나중결제를 통해 소액(30만 원~130만 원)으로나마 신용거래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좌측이 '나중결제(Buy Now Pay Later, BNPL)', 우측이 일반적인 '후불결제(deferred payment)'의 모습입니다.


나중결제, 가맹점에게 고객의 할부이자를 대신 내도록 하는 사업 모델

그런데 신용등급 심사 없이 신용거래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신용거래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위험(e.g. 고객의 파산)에 대한 최소한의 방지책도 마련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거기에다 주요한 수익의 원천인 연회비와 할부이자도 받지 않는다니, 이쯤되면 나중결제가 도대체 어떻게 수익을 충당하는 것인지 의문이 드실겁니다.


이제 나중결제가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정도만 남았습니다. 바로 연체 수수료와 가맹 수수료이지요. 놀랍게도 나중결제의 연체 수수료는 연 12%인데요, 이는 일반적인 카드사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나중결제를 제공하고 있는 페이팔(PayPal)은 나중결제의 연체 수수료조차 받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그렇다면 나중결제는 가맹 수수료만으로 수익의 부족분을 충당한다는 것인데요, 가맹점 수수료가 얼마나 높은 것일까요?


예측대로 나중결제의 가맹 수수료는 5~6% 수준으로, 2~3% 수준인 카드사의 가맹 수수료보다 2배가량 높습니다. 이 수치만으로는 나중결제의 가맹 수수료가 다른 수익원을 포기한 것을 상쇄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요구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우실텐데요, 이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기존의 가맹 수수료에 고객의 할부이자를 얹은 정도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 나중결제는 가맹점으로 하여금 고객의 할부이자를 대신 내도록 하는 사업 모델인 것입니다. 가맹점에 불리한 사업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가맹점이 나중결제 서비스를 도입하는 이유야 뻔합니다. 고객의 물적∙심적 구매 문턱을 다각도로 낮춤으로써 유입되는 새로운 고객들을 확보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쿠팡을 비롯하여 네이버, 카카오와 같이 이미 먹고 살만한 공룡 플랫폼들이 이 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까닭이 석연치가 않습니다. 나중결제의 한도는 매우 작은 편이며 만 18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에게나 신용거래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상당 수준의 충당금을 보유해둬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나중결제의 진짜 목표는 청년부터 노년으로 이어지는 신용사회

결국 나중결제의 진짜 목표는 단기의 수익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나중결제는 '소비 욕구는 높지만 신용도가 낮은 연령대의 고객'에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갚을 수 있을 것 같은 30만 원 정도의 신용거래를 일상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앞서 나중결제는 신용등급 심사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결제업체가 고객의 신용등급을 조회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의 한 가지 의미가 더 숨어 있습니다. 한도가 고객의 소득이나 재산 수준에 따라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 패턴으로 설정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7월에 소비 증가를 보이는 고객에게는 당월에 한도를 상향해주는 것이죠. 한도 설정에 대한 일관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를 개인 부채의 영리한 조장이라고 하지 않고, AI와 빅데이터 기반의 혁신 금융 서비스라고 부르고 있답니다.


이렇게 영리한 '혁신' 금융 서비스는 교복을 갓 벗은 19살부터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한 사회 초년생에게 신용거래의 위험을 학습할, 아니 인지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의 위험성은 당장의 작은 욕구들을 빠르고 손쉽게 해소하는 삶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A는 자취 중인 취준생입니다. 월세, 통신비, 생필품 등 숨만 쉬어도 필요한 것이 태산입니다. 면접을 앞두고 있어 알바를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다음 주까지 잡힌 면접 일정만 끝내면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당장 생수도, 라면도 떨어져갑니다.

쿠팡 최저가를 전전하던 중에 나중결제를 알게 됩니다. 30만 원이 수중에 생긴 기분입니다. 생수와 라면을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려다, 30만 원을 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즉석밥, 스팸, 참치 캔, 삼겹살, 맥주까지 주문해버립니다. 면접 마치고 났더니 금방 나중결제를 갚을 날이 왔습니다. 면접에서는 줄줄이 낙방하는 중입니다.

A는 쿠팡이츠를 떠올립니다. 곧장 쿠팡이츠 배달원에 등록합니다. 쿠팡이츠 배달을 며칠 뛰었더니 나중결제로 갚아야 할 돈을 다 벌었습니다. 후련합니다. 힘들었지만 해 볼 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이 들어왔습니다. A는 입금된 용돈에 30만 원이 더해진 느낌을 받습니다. 결국 나중결제를 알기 전보다 소비가 늘었습니다. 다시 쿠팡이츠를 열어봅니다. A는 나중결제와 쿠팡이츠를 반복합니다.


쿠팡 제국, 소비의 노예와 노동의 노예 동시에 얻어

제가 쿠팡에서 나중결제를 보자마자 A의 이야기가 머릿 속에 그려졌습니다. '일단 나중결제 하고, 쿠팡이츠로 갚자!'라는 환장할 굴레가 말입니다. 쿠팡 입장에서는 고객들이 이전보다 덜 고민하고 구매해줘서 좋고, 고객들 중 일부는 쿠팡이츠 노동자로 돌아오니 땅 짚고 헤엄치는 기분이겠다 싶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네이버∙카카오 나중결제와 달리 금융 당국 규제도 안받는 쿠팡 나중결제

쿠팡은 자사가 직매입한 물품(로켓 배송, 로켓 와우, 로켓 프레시)에 대해서만 나중결제를 허용했기 때문에 금융당국의 규제를 받는 금융업으로조차 분류되지 않습니다. 쿠팡은 자사의 나중결제 수익에서 가맹 수수료마저 취하질 않는 것이죠. 그러니 쿠팡의 나중결제 도입의 목적은 네이버나 카카오의 나중결제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나중결제를 통해 가맹 수수료마저 취하지 않는 쿠팡이다보니 금융 당국의 규제에서까지 자유로워, 네이버나 카카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업계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복병이 나타납니다. 쿠팡의 나중결제가 중고거래 사이트 등에서 ‘현금깡(일명 페이깡, 급전이 필요한 이가 나중결제를 통해 물건을 대리구매 해주고 현금을 즉시 받는 수법)’ 형태의 거래가 성횡하면서 금융 당국으로부터 제재의 여지가 생긴 것이죠. 그러나 마지막 제재의 기회를 금융 당국은 '혁신'의 일시적인 어두운 면이라 치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머지 않아 전국민의 사용자(employer? emperor?)될 쿠팡

그런데 금융 당국이 일시적이라 진단한 현금깡 현상은 쿠팡 제국발 신용사회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돈을 벌어보기도 전부터 돈을 빌리도록 부추기는, 플랫폼 노동을 정상화하는, 그래서 지속적 노동의 의지와 가치를 상실시키는 신용사회가 머지 않았습니다. 금융업 아닌 금융업까지 허용하여 쿠팡에게 전국민의 사용자가될 권리를 부여해 쿠팡의 제국화를 돕고 있는 이 상황이 비통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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