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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바람 Sep 21. 2024

영어 모임과 코타키나발루

영어 모임을 오래 했다. 모자란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나간 모임이었지만 모임장과 친해지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점차 영어를 잘하기 위해 나가기보다 대화를 하기 위해 나가는 모임이 되었다. 모임은 특이했다. 보통 모임의 성격은 모임장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수도원보다 더 엄숙한 곳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의 왕국 못지않게 난잡한 곳일 수도 있다. 그 영어 모임은 수도원에 가까운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영어에 진심이었고 진지한 축이었다.  


모임장은 모임 주제(Topic)에 성역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더 쉽게 말해 정치, 종교, 성별 이야기도 가능한 모임이었다. 이런 이야기의 끝은 파국이었지만 모임장은 지지리도 말을 듣지 않은 타입이었다. 이제까지 문제가 없었고 잘 운영해 왔기에 모임장은 자신만만했다. 으레 자신이 거쳐왔던 모임을 이야기하며 그날도 모임장은 자신 있게 성별 논쟁 주제를 꺼냈다. 안타깝게도 얼마 뒤 모임은 성대하게 박살 났다. 모임장을 따르는 여자 회원은 장문의 톡을 남기며 모임을 떠났고, 모임에 실망한 사람은 모임장을 실컷 욕했다. 단 한 번의 모임으로 파산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날 주제는 평이한 주제였다. “소방대원을 뽑는데 남녀 공평한 기준을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여성을 배려한 특별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론에서도 흔히 다루는 주제였고 공평을 화두로 두는 2030 세대들에게도 친숙한 주제였다. 문제는 친숙함 속에 숨어 있는 깊은 골짜기였다. 어떤 이에게 이 주제는 자기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중대한 문제였다. 모임장은 순수한(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마음으로 접근했지만, 그 문제를 다루는 당사자에게 있어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이후로 금기 주제는 다시는 모임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두 쪽이 날 주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는지 그는 이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술에 취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면 후회를 늘어놓긴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 얘기를 듣고도 못 본 척하는 사람이 되었다. 성역 없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았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날 이후 모임은 보이지 않게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그 주제가 그렇게 모임을 위태롭게 만든 주제였을까? 주제를 돌이켜 생각해 보자. 현장에서 무거운 호스를 끌며 불을 끄는 대부분의 현장대원들이 남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여자 소방대원들은 홍보의 일을 담당하거나 현장과는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남녀 똑같이 현장에서 불을 끄는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순진한 질문을 하는 이들도 있다. 현장 직원들은 그럴 때마다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꾸한다. “여자는 도움이 안 된다.” 


여자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현실은 냉엄하다. 그러니까 불 끄는 일에는 체력과 힘이 필요하다. 불을 끄고 목숨을 구하는 현장에 남자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남자들이 더 필요하다. 기계적인 균형 논리 – 50대 50 – 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수치인 것이다. 현장에서는 남자 대원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지만 현장 밖에서는 여자들을 더 많이 뽑으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소방대원들은 가중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악순환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더 센 것은 자명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벌어진 촌극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MTF)과 싸운 시스젠더인 여성 복싱 선수는 무려 49초 만에 경기를 포기했다.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경기를 포기했다. 경기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조건을 제한하고 규제를 강화해도 남자의 생물학적 힘에 여자들이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프로 경기에는 이게 더 극심하게 드러난 것이다. “여자들도 남자와 같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만 살펴봐도 허구에 가까운 주장인 것을 알 수 있다. 


재난 현장에서 구조를 하는 일에는 상당한 힘이 따른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중요한 부분이기에 다시 강조하는 말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여성 대원이 없었던 것은 단순히 성차별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힘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는 남성이 대접을 받은 것이다. 여성이 물리적인 힘에서 남성과 동일하다면 이런 논란은 애초부터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행히 이러한 현실 문제를 인식했는지 2024년 1월, 소방공무원 채용 기준이 남녀 동일하게 바뀐다는 기사가 났다. 2027년부터 동일 평가 기준을 두고 남녀 소방공무원 실기가 진행된다. 재난에는 남녀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리고 내부의 불만을 수용한 변화다. 일각에서는 여자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주장했다. 이는 남자 채용을 가속화하고 여자들을 구조적으로 제거하는 일이라는 주장. 


그러나 재난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인명구조 영역에서 남자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인명 구조 외의 영역에서 여자 소방대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 역할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업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남녀 누구에게 공평한 기준을 적용해 채용하는 것이 맞다. 기계적인 여성 대원 할당은 공정을 위하는 것이 아닌 불평등을 강화하는 일일 것이다. 


모임장은 그 이야기를 길게 영어로 이야기했다. 유창한 영어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자 회원들은 그 이야기를 듣질 않았다. 여성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대안을 이야기하거나 다른 주장을 펼치진 못했다. 차별을 ‘구조화’하는 것에 대해 유려하게 이야기를 펼친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람도 재난 상황에서의 소방대원이라는 문제에서 별다른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물론 지금에 와선 다 지난 이야기다. 모임은 어쨌거나 매우 큰 위기로 인해 흔들렸고 이를 겨우 수습해 다시 명맥을 이었다. 1년 뒤 모임장은 이제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며 홀연히 모임을 떠났고 나는 모임장과 그 뒤로 종종 소식을 교류했다. 오랜만에 만나자는 그의 말에 나는 고깃집을 잡았다. 그는 고깃집은 부담스럽다며 조용한 와인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 수 있어 허리띠를 느슨하게 매며 가게에 들어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임장을 저주하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났던 사람이 모임장과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다.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말이 입 속에 맴돌았지만 꺼내진 않았다. 매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며 코타키나발루 여행 계획을 세우는 그 커플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앞서 얘기했듯이, 오래된 일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일 것이다. 나는 포트 와인을 들이켜며 붉어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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