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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바람 Nov 22. 2024

해고 통보와 노트북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작가님과 다시 좋은 인연이 닿길 바랍니다”


해고 통보는 한 줄이었다. 점심 때 날아온 업체의 메시지는 깊숙하게 내 폐부를 찔렀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부업으로 3년 간 같이 일했고,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다. 사유를 물어보니 재정 악화였다. 그러지 않아도 업체 대표는 자리를 자주 비웠다. 주제 컨펌이 나질 않아 매번 주제를 기다려야 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짜증 아닌 짜증을 내며 불평했던 기억을 다시 되새겨보니, 업체 대표가 돈을 꾸러 외부 출장을 나간다는 해명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조짐은 있었지만 내가 그 조짐을 몰라본 것이었다. 


이 업체와 연을 맺었던 것은 사실 홧김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자존감이 바닥이었고 지금은 퇴사한 회사 사장과의 불화로 인해 나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고 내가 쓰고 있는 원고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걸 확인하고자, 유튜브 프리랜서 원고 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을 했다. 공고를 올리자마자 대표는 바로 내게 전화했다. “통화되시죠?” 짧고 간결한 한마디. 별거 아닌 한마디였지만 그 서늘한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포트폴리오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연락을 했다고 밝힌 대표는, 일주일에 몇 건을 작업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시원한 일 처리였다. 보통 톤앤매너를 맞춘다고 몇 건의 테스트 원고를 작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표는 그런 절차를 생략했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보였다는 대표의 말 한마디에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공치사였겠지만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던 내게 그 말 한마디는 너무 소중했다. 이 사람과 일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속전속결로 외주 일을 맡게 되었다. 일주일 2번. 평일과 주말에 한 건을 맡아 작업을 하면 되었다. 휴일이 껴 있을 경우 주말에 1건을 더 추가 작업하면 되는 일이었다. 


주제는 늘 내가 다뤘던 것이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대표가 원하는 자극적인 문구나 표현들, 그러니까 유튜브 콘텐츠에 필요한 어그로 포인트는 적응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가 납득할만한 원고를 낼 수 있었다. 대표는 항상 ‘작가님’이라는 표현으로 날 불렀다. 사소하지만 대표가 보여주는 존중은 꽤나 즐거웠다. 본업에서 인정받지 못한 부분을 부업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었다. 


돈은 많지 않았다. 애초부터 돈을 벌고자 이 일을 지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비용을 낮게 불렀다. 대표는 그 금액으로 일하는 게 괜찮은 지 내게 물었다. 괜찮다고 호기롭게 대답했다. 진짜로 돈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기에 그 부분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표는 그런 모습이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대표는 내게 전화를 해서 금액을 올렸다고 말했다. 어쨌든 돈을 더 받을 수 있었기에 나는 기뻤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작가님이 말했지만, 작가님 역량에 맞지 않은 금액입니다. 더 받는 게 맞아 보였습니다” 그는 금액 인상의 이유를 덧붙였다. 굳이 덧붙인 그 한 마디가 고마웠다. 더 깎으려고 하면 깎을 수도 있었고, 트집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표와 소통을 이어갔지만 나중에는 담당자가 생겼다. PD라는 직함을 단 담당자와도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나름 빠르게 바뀌는 업계라 일을 오래 지속하지 않은 프리랜서 작가들이 많았다. 그런 작가들만 맡던 PD가 나와는 오래 일을 같이 하게 되면서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여러 작가님들을 맡았지만 원고를 꾸준하게, 그리고 오래 작업하는 작가님은 내가 처음이라고.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냥 쓰면 되는 거라고, 허세를 부렸다. 


인정받아 기쁜 것도 잠시, 사실 어느 순간부터 원고를 쓰는 게 지겨운 순간이 찾아왔다.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소재는 주기적으로 등장하기에, 다른 주제를 쓰고 싶어도 조회수를 위해 예전 썼던 원고를 재탕해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주제도 제시하고 기획에 공을 들였지만 그런 일도 점점 재미없어지면서 습관처럼 쓰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대표와 PD는 내 글을 좋아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입장에서 지루한 글은 보는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경우가 있었고, 그게 이 업체와 내가 일을 오래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슬럼프도 겪고 여러 사이클을 거치면서 글은 점점 정형화되었다. 다양하게 쓰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조회수라는 대의명분을 생각하면서, 외주작가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글을 이어갔다. 더울 때나 추울 때나 한결같이 주고받는 글은 내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밑바닥까지 끌고 갔던 회사와 결별했을 때도, 친한 친구의 비보에도, 사촌 누나의 성대한 결혼식의 순간에도 나는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쓰고 있었다. 마감은 내 일과 상관없이 닥쳐왔고 데드라인을 넘기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나는 계속 글을 썼다. 


언제나 내 옆에 있을 것 같은 휴대폰 충전기처럼, 평온한 순간에 날아온 해고 통보는 그런 의미에서 충격이 훨씬 컸다. 의식처럼 지속하던 일을 갑자기 중단하면 어색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료 조사를 위해 웹서핑을 하거나, 새벽까지 원고를 다잡는 그런 순간들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공백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밀려드는 슬픔에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대체 왜 나는 슬픈 것일까? 지겨운 글쓰기가 끝난 순간에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해고 통보 이후 나는 남은 원고 금액 정산을 위해 PD랑 이야기를 해야 했다. 월말 지급이 원칙이라 이번 달 말에 지급을 해도 되는지 PD는 물어봤다. 나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제 막 생각난 것처럼 PD에게 이야기를 했다. 혹시 가격이 문제라면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작업을 계속 할 수 없는지 그에게 구걸했다. 업체 사정이 어려워 편집자도 자르고 있고 업로드 숫자도 줄이는 중이라고 PD는 말했다. 대표도 업체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꾸러 밖에 나가 있었다. 더 이상의 설득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알겠다며 행운을 빌었다. 


3년이라는 기간이 짧은 기간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3년 그 이상의 의미가 글 쓰는 모든 순간에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쓰는 그 순간이 비록 지겹거나 짜증나는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게 박탈당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슬픈 순간이었다. 퇴근 후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펴고 빈 워드 화면을 바라보았다. 원고를 쓸 준비를 마치고 나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었다. 폈던 노트북을 닫았다.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겨울이었다. 더웠던 날이 언제였는 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비수처럼 추운 날씨는 정신까지 흔들 정도로 차가웠다. 나는 더 이상 챙기지 않아도 되는 노트북을 습관처럼 가방에 담았다. 무겁게 왜 자꾸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냐는 어머니의 핀잔에도 나는 ‘별로 무겁지 않다’는 말로 소중하게 노트북을 챙겼다. 대표와 연락하기 위해 여러 번 연락을 했지만 대표는 아직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누가 듣지도 않지만 나는 입 밖으로 그 말을 되새기며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내 가방 한 켠에 담긴 노트북의 무게를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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